'피의사실 공표' 논란이 새삼 뜨겁습니다. 전직 대통령까지 소환돼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수사기관이 공판(재판) 청구 전에 피의사실을 공표할 경우 이를 처벌하는 형법 126조(피의사실 공표죄)는 최근 몇년 사이 신설된 규정은 아닙니다. 1953년 당시 형법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있던 조항입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요새 피의사실 공표가 난리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만큼 해당 조항이 사(死)문화 돼있었다는 점을 방증합니다. 형법 126조가 이만큼 '핫(hot)'했던도 없고 형법 126조 위반으로 처벌 받은 사례를 찾기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피의사실 공표 논란에 '새삼'이라는 글자를 붙인 이유입니다.
물론 사문화된 조항이라고 해서 계속 묻혀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정당한 요구가 있다면 사문화된 조항도 살아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해당 조항이 살아나게 된 과정, 그리고 살아난 뒤 적용되는 과정에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피의사실 공표죄'는 왜 살아났나?
2019년 8월 소위 '조국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장관 후보자에 오르자 사모펀드, 자녀 입시비리 등 조 전 장관 일가를 둘러싼 각종 의혹들이 보도됐습니다. 검찰은 수사에 들어갔고 이와 관련된 보도 역시 이어졌습니다. (관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경심 동양대 교수는 지난해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됐으며 조 전 장관의 재판은 진행 중입니다.)
그러자 여권 인사들은 조 전 장관 관련 보도에 문제가 있다며 집중 공세에 나섰습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피의사실 공표죄와 관련해 검찰에 대한 고발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2019년 11월 법무부는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 (훈령 제1265호)'도 만들었습니다. 해당 규정 제 1조는 "이 훈령은 형사사건 피의자 등 사건관계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무죄추정의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국민의 알권리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 7조에서는 △사건관계인의 인격 및 사생활 △사선관계인의 범죄전력 △사건관계인의 주장 및 진술·증언 내용, △검증, 감정 등의 시행 및 거부 사실 △증거의 내용 등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습니다.
제 19조에서는 검사와 수사관이 기자를 만났을 때 취해야 하는 행동 매뉴얼도 정해줬습니다.
그렇게 조국 사태를 계기로 피의사실 공표죄는 살아났습니다. '사법농단' 수사 때도, '국정농단' 수사 때도 언론 보도는 조국 사태때와 마찬가지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사문화된 채 묻혀있던 피의사실 공표가, 오히려 박수받던 피의사실 공표가 2019년 말에는 살아있는 처벌 조항이 됐습니다.
조국 보호한 피의사실 공표, 한달 뒤 김건모는?
피의사실 공표죄가 특정인을 위해 살아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해당 조항은 '모든' 피의자들의 인권을 '동등하게' 보호해줘야 마땅합니다.과연 그랬을까요?
2019년 11월 법무부 훈령이 만들어지고 한 달 뒤인 2019년 12월, 가수 김건모씨가 성폭행 혐의로 고소됐습니다. 이후 각종 피의사실들이 '공표'됐습니다. 김건모씨가 특정 무늬가 그려진 티셔츠를 건넸다거나, 술자리에서 어떠한 농담을 했다거나, 경찰이 고소장을 제출한 A씨를 김건모씨가 업소 관계자를 통해 회유했는지 알아보고 있다거나, 차량을 압수수색해 GPS를 확보했다거나 등등 말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관련 보도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경찰을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하겠다'거나 '무분별한 피의사실 공표가 매우 우려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어느 장관의 피의사실 공표를 막기 위해 집중 공세가 이어졌는데, 어느 가수의 피의사실이 공표된 데 대해서는 그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선택적'으로 금지된 피의사실 공표
비슷한 현상은 2021년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LH 부동산 투기 의혹 수사나 노원 세모녀 살인 사건은 거의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지난 5일 친모가 기소된 구미 3세 여아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고인 조사 과정에서 석씨의 임신과 출산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도 보도됐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선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정권의 핵심을 겨냥한 '청와대발 기획사정' 의혹은 어떨까요? 관련 보도가 나자마자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한다고 볼 만하다. 묵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대검찰청 과거사 진상조사단에서 활동했던 박준영 변호사는 "피의사실 공표 금지가 이해관계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리 편에 대한 피의사실 공표는 범죄이고 상대편에 대한 공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는 공익적 공표로 보는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습니다.
무차별적인 피의사실 공표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아무리 사문화된 조항일지라도 시대적 요구가 있으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찰 내부에서도 피의사실 공표를 곱게 보지는 않습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수사는 기본적으로 은밀하게 진행돼야 한다"며 "수사 정보가 흘러나가면 (수사를) 담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방해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사건관계인의 인권을 보호함과 동시에 국민의 알권리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던 그 조항이 과연 모든 국민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인지, 국민들의 알 권리와 조화를 이루며 제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혹여 국민들의 관심을 특정 사건에만 쏠리게 하려는 것은 아닐지, 특정인을 보호하는 도구로 전락한 것은 아닐지 의문이 가시지 않습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