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지난달 17일 한국거래소에 공식 제출한 지난해 사업보고서엔 연구개발비 항목이 포함돼 있다. 상장기업들은 연구개발비 항목에 대해 의무공시를 해야 한다. 금융감독원은 연구개발비를 사업보고서의 중점 항목으로 간주하고, 철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KAI가 공개한 지난해 연구개발비는 4277억원. 전년(2129억원) 대비 2000억원가량 늘었다. 매출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6.85%에서 15.21%로 배 이상 급증했다. 정보기술(IT) 기업이 아닌 방위산업체의 연구개발비가 1년 만에 이 정도로 급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유가 뭘까.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연구비와 개발비를 합산하는 과정에서 총액이 부풀려진 것이다. KAI가 공개한 지난해 연구비는 1518억원, 개발비는 432억원. 이를 합친 총 연구개발비는 1950억원이다. 이 경우 매출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6.94%로 뚝 떨어진다.
기자가 지난달 25일 R&D 투자가 급증한 이유를 문의하자 KAI 측은 숫자를 더하는 과정에서 잘못 기재됐다고 인정했다. 단순 오류라는 것이 KAI의 해명이었다. 그러면서 정정공시를 내겠다고 했다. 기자의 문의 전까지 KAI는 공시가 잘못됐다는 점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사업보고서를 심사한 회계법인도 마찬가지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기자가 KAI에 관련 문의를 한 건 지난달 25일. 하지만 3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사업보고서는 수정되지 않았다. 부풀려진 연구개발비는 지금도 사업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 기업이 공시 오류를 발견하면 곧바로 기재정정 공시를 내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기자의 추가 문의에 KAI 측은 다음주에 정정공시를 내겠다고 했다.
사업보고서를 허위로 공시하면 금감원으로부터 과징금과 매매정지 등 징계를 받을 수 있다. 수시공시는 한국거래소가 맡지만 사업보고서는 금감원이 징계 여부를 결정한다. 물론 의도적인 허위 공시가 아닌 단순기재 오류의 경우 중징계를 받을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도 나온다.
단순 오류인지 의도적 부풀리기인지 여부를 떠나 공시가 잘못됐다면 기재정정은 당연한 수순이다.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를 최초 개발한 대표 방산기업이 공시 오류를 방치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만 할까. 더욱이 KAI는 불과 4년 전인 2017년 수천억원대의 분식회계 의혹으로 곤욕을 치른 아픈 경험이 있다. 당시 일부 임원은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구속돼 재판까지 받았다. 주주들의 외면을 받으면서 KAI 주가도 급락했다가 지난해부터 간신히 회복하는 추세다. 시장의 신뢰를 얻기는 오래 걸리지만 잃는 건 한순간이다. 공시 오류를 가볍게 넘기면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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