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등잔불 치는 나비 저 죽을 줄 알았으면 어디서 식록지신(食祿之臣) 죄 짓자 하랴마는 대액(大厄)이 당전(當前)하고 눈조차 어두워서 마른 섶을 등에 지고 열화(烈火)에 듦이로다. 재 된들 뉘 탓이며 살 가망 없다마는 일명(一命)을 꾸이오셔 해도(海島)에 내치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중략> 눈물로 밤을 새와 아침에 조반 드니 덜 쓰른 보리밥에 무장떵이 한 종자라. 한술을 떠서 보고 큰 덩이 내어놓고 그도 저도 아조 없어 굶을 적이 간간이라. 여름날 긴긴 날에 배고파 어려웨라. 의복을 돌아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남방염천(南方炎天) 찌는 날에 빨지 못한 누비바지 땀이 배고 때가 올라 굴뚝 막은 덕석인가? 덥고 검기 다 바리고 내암새를 어이하리? 어와 내 일이야 가련히도 되었고나. 손잡고 반기는 집 내 아니 가옵더니 등 밀어 내치는 집 구차히 빌어 있어 옥식진찬(玉食珍饌) 어데 가고 맥반염장(麥飯鹽醬) 대하오며 금의화복(錦衣華服) 어데 가고 현순백결(懸百結) 하였는고? 이 몸이 살았는가? 죽어서 귀신인가? 말하니 살았으나 모양은 귀신일다. 한숨 끝에 눈물 나고 눈물 끝에 한숨이라. 도로혀 생각하니 어이없어 웃음 난다. 이 모양이 무슴 일고 미친 사람 되었고나. <중략> 어제는 옳던 일이 오늘이야 왼 줄 아니 뉘우쳐 하는 마음 없다야 하랴마는, 범 물릴 줄 알았으면 깊은 뫼에 들어가며, 떨어질 줄 알았으면 높은 나무에 올랐으랴? 천동(天動)할 줄 알았으면 잠간 누에 올랐으랴? 파선할 줄 알았으면 전세대동(田稅大同) 실었으랴? 실수할 줄 알았으면 내기 장기 벌였으랴? 죄지을 줄 알았으면 공명 탐차 하였으랴? 산진메 수진메와 해동청 보라매가 심수총림(深樹叢林) 숙여 들어 산계야목(山鷄野鶩) 차고 날 제 아깝다 걸리었다 두 날개 걸리었다. 먹기에 탐심(貪心) 나서 형극(荊棘)에 걸리었다.
안조환, ‘만언사(萬言詞)’
살 가망 없다마는 일명(一命)을 꾸이오셔 해도(海島)에 내치시니 … 먹기에 탐심(貪心) 나서 형극(荊棘)에 걸리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듯, 고통은 문학의 어머니다. 기쁨, 행복보다는 슬픔, 불행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크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조선 양반들에게 문학 창작의 계기가 되는 고통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아무래도 ‘유배(流配)’만큼 큰 고통도 없을 듯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유배 문학’이라는 하위 장르로 묶일 만큼 유배와 관련한 문학 작품이 수없이 많다. 유배는 귀양 보내는 것을 말한다. 죄인을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한 기간 동안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던 형벌이다. 원래 귀양은 방축향리(放逐鄕里), 즉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내쫓던 형벌의 뜻으로 유배와는 달랐으나, 타향으로 내쫓는 것이 굳어지면서 유배와 뜻이 같아졌다. 이 작품에서 ‘해도에 내치시니’라고 한 것은 임금이 섬으로 귀양을 보내주셨다는 의미이다.유배는 중한 죄를 범한 자를 사형에 처하는 대신에 먼 곳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이 작품에서도 ‘살 가망 없다마는 일명(一命)을 꾸이오셔’라고 했는데, 이는 원래 사형을 당해야 하는데 임금이 목숨만을 살려 주셨다는 뜻이다. 이런 것을 보면 유배는 사형에 버금가는 매우 혹독한 형벌이었다.
유배지는 죄질에 따라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는데, 중죄인일 경우 함경도의 삼수, 갑산과 전라도의 흑산도, 그리고 제주도 등으로 보내졌다. 안조환의 죄는 ‘먹기에 탐심(貪心)’이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주색잡기에 빠져 국고 횡령죄를 범했는데, 유배지가 남해안의 추자도인 ‘형극(荊棘: 나무의 온갖 가시. 고난)’을 당한 것을 보면 그 죄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몸이 살았는가? 죽어서 귀신인가? 말하니 살았으나 모양은 귀신일다.
그러면 유배 생활은 어땠을까? 이 작품에서 안조환은 자신을 살아 있는 ‘귀신’이라 하였다. 그만큼 참혹한 생활을 했던 것이다. ‘눈물로 밤을 새’고, ‘굶을 적이 간간이’었으며, ‘남방염천(南方炎天: 남쪽 지방의 몹시 더운 날씨)’에도 ‘빨지 못한 누비바지’를 입어야 했다. ‘옥식진찬(玉食珍饌: 맛있고 진귀한 음식)’, ‘금의화복(錦衣華服: 비단 옷과 화려한 옷)’의 한양 생활이 ‘맥반염장(麥飯鹽醬: 보리밥과 소금장)’, ‘현순백결(懸百結: 옷이 해어져서 백 군데나 기웠다는 뜻)’의 생활로 바뀌었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뿐이랴? ‘등 밀어 내치는 집 구차히 빌어 있’어야 했다. 유배 온 사람들이 좋을 것 하나 없었던 집 주인의 괄시가 이만저만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통이니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참혹한 생활을 담은 문학 작품으로 이어졌던 것이다.물론 막강한 권력을 가졌거나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집안 양반들의 유배는 이보다는 나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 죽을 때까지 유배지에 있어야 했지만 중간에 유배가 풀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유배지의 수령이나 아전들이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또한 학식이 높은 양반이 유배 올 경우 마을 사람들은 서당을 열고 어린 선비들의 교육 기회로 삼기도 했기 때문에 유배자에 대한 대우가 좋기도 했다. 그러나 안조환의 경우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작품 속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을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유배 문학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뉘우쳐 하는 마음이야 없다야 하랴마는, … 죄지을 줄 알았으면 공명 탐차 하였으랴?
죄인이 지은 문학 작품 속에 당연히 빠질 수 없는 내용은 ‘속죄(贖罪)’이다. 고려 의종 때, 정서는 ‘정과정’을 지어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기도 하지만, 대개 유배 문학은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뉘우쳐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자신을 ‘산진메 수진메와 해동청 보라매’로 비유하여, ‘심수총림(深樹叢林: 나무가 우거진 깊은 숲)’으로 비유되는 관직에 올라, ‘산계야목(山鷄野鶩: 산 닭과 들 오리) 차고 날’았던 자신의 일, 즉 욕심을 부려 국고를 횡령했던 죄를 고백하고 있다. 이와 함께 ‘죄지을 줄 알았으면 공명 탐차 하였으랴?’라고 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한다. ‘범 물릴 줄 알았으면 깊은 뫼에 들어가며, 떨어질 줄 알았으면 높은 나무에 올랐으랴? 천동(天動)할 줄 알았으면 잠간 누에 올랐으랴? 파선할 줄 알았으면 전세대동(田稅大同: 세금으로 걷은 쌀) 실었으랴? 실수할 줄 알았으면 내기 장기 벌였으랴?’라는 비유적 표현을 여러 번 열거한 것은 그 후회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 포인트
① 고통이 문학 창작의 계기가 됨을 이해하자.② 유배는 양반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던 형벌임을 알아 두자.
③ 유배지에서의 참혹한 의식주 생활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은 괄시를 상상해 보자.
④ 유배를 당한 죄인이 고백한 속죄의 마음을 이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