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마일은 지금껏 여섯 명만 달성했어. 달에 간 사람도 그보단 많다고.”
1년 중 322일을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는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 분)은 ‘1000만 마일’을 달성하는 게 유일한 목표다. 영화 ‘인 디 에어’ 속 라이언의 직업은 ‘해고 통보 대행 전문가’. 그의 직장은 고객(기업)의 요청을 받으면 직원을 각지로 보내 고용주 대신 해고 통보를 해주는 해고대행업체다. 집이나 가정을 꾸리는 것을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라이언은 비행기와 낯선 호텔에 머무는 생활을 즐긴다. 어느 날 공항 바에서 늘 출장 다니는, 자기와 비슷한 삶을 사는 알렉스 고란(베라 파미가 분)을 만난 라이언은 타지에서 서로 외로울 때 전화와 문자를 할 수 있는 쿨한 관계를 이어간다.
마일리지는 거리 단위인 ‘마일’의 수를 뜻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항공사인 미국 아메리칸항공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이 ‘대단한 일’이던 시절, 자사 항공편을 계속해서 탑승해달라는 목적에서 시작했다. 이제는 항공사는 물론 동네 PC방에서도 자사의 포인트 제도를 ‘마일리지’라고 표현할 정도로 적립금, 포인트와 동의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라이언은 남들이 체크인 카운터 앞에 긴 줄을 설 때 사람 한 명 없는 우수회원 전용 카운터로 직행한다. 항공사의 멤버십 포인트일 뿐인 마일리지 제도에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이유는 이런 ‘희소성’에 있다.
‘희소성의 원리’는 어떤 재화의 공급량이 한정돼 있을 때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격이 더 높은 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을 말한다. 우수회원이 되면 우선 체크인, 항공기 우선 탑승, 수하물 우선 처리 등 ‘우선’의 자격이 주어진다. 라이언은 모든 걸 마일리지가 적립되는 신용카드로만 결제한다. 결제 시 1000원당 1마일리지를 주는 신용카드가 보편화되며 국내에서도 비행기 한 번 안 타고 마일리지를 쌓는 일이 흔해졌다. 자연스레 항공 마일리지의 희소성도 크게 떨어졌다.
항공 마일리지가 흔해지다 보니 마일리지를 카드사 등에 판매해 항공사들이 벌어들이는 수익도 막대해졌다. <그래프>는 세계 주요 항공사의 마일리지 프로그램 수익을 보여준다. 소비자들이 마일리지를 쓰는 빈도가 높아지자 항공사들은 소비자에게 불리하도록 마일리지 사용 제도를 ‘개악’하기도 한다. 최근 대한항공은 장거리 국제선 항공권의 마일리지 구매 가격을 최대 60%까지 올리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여느 때처럼 라이언이 비행기에서 상공을 날고 있을 때 기내 안내방송이 나온다. “특별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더뷰크 상공을 지나는 이 순간 여러분 중 한 분이 1000만 마일을 달성했습니다.” 하필이면 난생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 알렉스가 유부녀인 것을 알게 돼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라이언은 그동안 꿈꾸던 세계에서 일곱 번째 ‘1000만 마일러’라는 희소성 높은 자격을 이날 얻었지만 우울했다. 정작 많은 사람이 보편적으로 누리는 사랑을 갖지 못해서다.
효율성 높이는 ‘얼굴 볼 일 없는 세상’
‘스펙’ 좋은 신입사원 나탈리 키너 (애나 켄드릭 분)는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해고하는 걸 모두 영상통화로 대체하면 출장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나탈리는 모든 ‘해고 전문가’가 보는 앞에서 동료 직원을 영상통화로 해고하는 시범까지 선보이며 비대면 전환으로 회사 출장비를 85%까지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라이언은 나탈리의 제안을 말도 안 되는 일로 치부한다. “자네 열정은 이해하는데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인간에게 감정이 있다는 걸 고려해야지.” 보험료와 항공료를 얘기하며 나탈리의 제안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회사 대표 크레이그 그레고리(제이슨 베이트먼 분)의 말에 라이언은 소리친다. “컴퓨터를 쓰기 시작하면 우리 모두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걸 모르세요?” 크레이그는 답한다. “쓸모없게 되는 건 자네지.”
‘비대면 이별’과 ‘비대면 해고’
크레이그는 라이언에게 출장에 나탈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대면 해고’의 중요성을 설득해보라고 한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공항을 들락날락하는 라이언에게 자신의 베개까지 커다란 가방에 넣고 공항에 나타나는 나탈리는 이해 안 되는 짐일 뿐이다. 나탈리도 라이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상형이 확고하고 결혼과 출산의 구체적인 시점까지 계획하는 나탈리에게 사랑을 믿지 않는 라이언은 이해되지 않는 존재다.‘비대면 해고’를 제안한 나탈리였지만, 자신을 따라 낯선 타지로 오게 한 남자친구에게 받은 것은 헤어지자는 ‘비대면 이별’ 통보. 설상가상으로 라이언을 따라다니며 처음으로 해고한 사람은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결국 나탈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퇴사한다. 나탈리가 선택한 퇴사 통보 역시 문자. ‘비대면 해고’ 방안을 극찬한 크레이그도 ‘비대면 사표’에는 “예의가 없다”며 화낸다.
결국 회사는 원래 방식대로 돌아간다. 비대면 해고 방안을 중지시키겠다는 크레이그의 말에 라이언이 묻는다. “이번 출장은 얼마나 걸리죠?” “기약 없어.” 가장 비인간적인 일인 ‘해고’마저도 비대면이 대면의 감성을 따라가지 못해서일까. 세상에는 기술만으론 대체가 안 되는, 인간의 감성이 필요한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다.
송영찬 한국경제신문 기자 0full@hankyung.com
NIE 포인트
① 희소성의 원칙이 합리적 선택과 결부해 경제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왜일까.② 많은 기업이 저마다 마일리지 혜택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고 항공사들이 각종 마일리지 혜택을 줄인 까닭은 무엇일까.
③ 4차 산업혁명의 발달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확산되는 비대면 세상에서 인간의 감성이 필요한 부분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