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대기실’, ‘맬서스의 덫’, ‘샤워실의 바보’. 근현대 서구 사회과학자들이 말한 것을 기원전에 이미 말한 사람이 있다. 바로 한비자(BC280∼233)다. 한비자의 텍스트를 꼼꼼히 읽다 보면 현대의 학자들도 깜짝 놀랄 만한 통찰이 보이는데, 한비자는 ‘주인과 대리인’ 문제도 이야기했다.
자, 주인과 대리인 문제가 무엇인가? 주인이 모든 일을 직접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생기는 문제다. 본인이 일을 다 할 수 없기에 대리인을 두고 일을 시키는데, 대리인이 약속한 대로 주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란 법은 없다. 주인은 대리인의 행위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에서 주인의 기대는 배반당하기 쉽다.
한비자는 이 주인과 대리인 문제와 모순을 가지고 군신관계를 논했다. 한비자가 군신관계를 보는 시각은 유가(儒家)와 근본적으로 다른데, 유사 가족 내지 부자 관계, 혹은 조건 없이 충성을 바쳐야 하는 관계, 당위와 의무만이 관철되는 사이로 보지 않았다. 군주와 신하는 ‘이익’을 매개로 만나는 사이일 뿐이다. 군주는 국가의 사무를 처리하고 국력을 증진시키고 부국강병을 위해 신하를 고용할 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다. 신하도 마찬가지다. 국록을 먹고 영지를 하사받고 명예라는 무형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출사를 하고 왕에게 고용돼 일하는 것일 뿐이다. 한비자는 군주와 신하, 이 둘이 철저히 이익을 매개로 해서 만난 사이고 일종의 계약관계라고 보는데, 문제는 대리인인 신하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신하는 대리인이 돼 주인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때론 주인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침해하기도 한다. 이런 나쁜 대리인들 때문에 군주의 권력은 위협받기 쉽고 국력이 휘청거리게 된다고 한비자는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한비자도 공자처럼 신하인 이상 신하된 도리를 하라면서 왕에게 충성하고 때론 아버지 섬기듯이 하라고 했을까? 아니면 대리인이 주인의 입장에서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한비자는 그런 주장들을 철저히 배격하려고 했다. 그가 생각한 대안은 신상필벌(信賞必罰)에 기초한 인센티브였다. 대리인이 주인의 이익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주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벌을 내려야 한다고 했는데, 주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게끔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 압박하라고 한 것이다.
한비자의 생각에 착한 대리인은 없다. 애초에 대리인이 착해지길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주인과 대리인 관계에서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호소하며 대리인들 보고 착해지라고 할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리인이 성실히 일하지 않을 수 없게끔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철저히 대리인을 부리는 주인의 몫일 뿐이다. 대리인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현재 사회는 군주도 없고 신하도 없지만 여전히 주인과 대리인들은 존재한다. 경영자는 주주의 대리인이다. 또 사원은 경영자의 대리인이다. 여전히 주인과 대리인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보이는 딜레마와 모순은 쉽게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한비자의 통찰이 지금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인데, 정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대리인일 뿐이다. 장관 이하 각료도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다. 그 대리인들이 주인인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가?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코앞이다. 대선도 1년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 우리의 대리인을 뽑는 행사인데 유권자들이 현명하게 대리인을 뽑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정치인들의 마음과 정신에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게끔 상황과 조건을 만들면 될 뿐이다. 그 상황과 조건은 냉정하고 준엄한 우리의 판단과 선택이 만드는 게 아닐까? 대리인인 그들 보고 착해지라고 하지 말자. 착한 대리인은 없다. 착한 정치인도 없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일 뿐이다. 주인인 우리가 현명하고 냉철해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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