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전 총장은 지난 4일 사퇴 입장문에서 “앞으로도 제가 어떤 위치에 있든 자유민주주의와 국민을 보호하는 데 온 힘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른바 ‘별의 순간’에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로 자유민주주의를 국민보다 앞세운 발언이었다.
윤 전 총장의 자유민주주의론은 검찰총장 재임 당시는 물론, 그의 검사 인생과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관통하는 정치·경제 철학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정부의 반(反)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목도하면서 윤 전 총장의 신념이 더욱 굳어졌다는 게 주변 인물들의 전언이다. 윤 전 총장이 앞으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안티 테제(반정립)’로서뿐만 아니라 향후 자신만의 정치 캐치프레이즈로 자유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프리드먼과 미제스 신봉자
윤 전 총장은 2019년 7월 취임 때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의제로 꺼내들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과거 우리나라의 법집행기관은 헌법체제의 수호를 적대세력에 대한 방어라는 관점에서만 주로 봐 왔다”며 “이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의 본질을 지키는 데 역량을 더 집중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검찰청 대변인실은 당시 윤 전 총장 취임사와 관련한 별도 설명자료까지 내며 “신임 총장의 검사 인생과 철학이 반영된 취임사”라고 설명했다. 대검 대변인실은 “신임 총장은 시카고학파인 밀턴 프리드먼과 오스트리아학파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있고, 자유시장경제와 형사 법집행 문제에 관해 고민해 왔다”며 “시장경제와 가격기구, 자유로운 기업 활동이 인류의 번영과 행복을 증진해 왔고, 이는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프리드먼과 미제스는 1947년 스위스에서 자유주의 학자들의 모임인 몽펠르랭소사이어티(MPS)를 결성해 자유주의 가치를 지키고 확산하는 데 힘을 쏟은 경제학자다.윤 전 총장의 취임사는 검찰 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한 검찰 관계자는 “전임자인 문무일 전 총장이 단순히 ‘민주주의’를 언급했던 것과 비교하면 윤 전 총장의 ‘자유민주주의’ 언급은 차별화가 된다”며 “검찰총장의 철학에 경제학자들의 사상이 반영됐다는 배경 설명도 이례적이었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법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느냐’는 방법에 관한 문제라면, 자유주의는 ‘개인을 규율하는 법이 어떠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다룬다. 개인의 자유, 사유재산권 보장, 작은 정부, 법의 지배를 핵심 가치로 삼는다. 윤 전 총장이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구별해서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큰 이유다.
윤 전 총장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부친인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전 한국경제학회장) 영향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윤 명예교수가 1979년 윤 전 총장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때 프리드먼의 저서 《선택할 자유》를 선물로 줬다는 일화도 있다. 윤 전 총장은 평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이 책을 꼽는다고 한다.
秋와의 갈등 후 잦아진 자유민주주의 언급
윤 전 총장은 취임 후에도 수시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과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추 장관이나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발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추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 문제가 불거진 지난해 8월 신임검사 신고식에서는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라고 언급했다. 추 장관의 윤 총장 축출이 무산된 지난해 12월에는 미리 배포한 신년사에서 “국가, 사회의 집단적 이익을 내세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함부로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핵심 가치”라고 강조했다.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윤 전 총장이 자유민주주의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발로 꺼내든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내놓고 있다. 현직 공무원으로서의 한계가 있긴 했지만, 윤 전 총장이 검찰 권력 축소 외에 문재인 정부의 반자유주의적인 통치 행위에 반기를 든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 4조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떼내려고 했던 문재인 정부 초기의 개헌 시도에 대해 법조인 윤 전 총장은 그동안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미국 정치권에서는 ‘미제스를 읽었다며 떠벌리는 정치인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며 “앞으로 윤 전 총장이 문재인 정부의 임대차 3법, 경제민주화 등 경제 정책 전반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조명되는 ‘윤석열 사단’ 수사
정치권 일각에서는 윤 전 총장과 그의 사단이 그동안 해온 수사가 자유민주주의 신념에 맞는 것이냐에 대한 의문도 제기한다. 윤 전 총장이 팀장으로 있던 ‘박영수 특검’은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을 수사하면서 최순실 씨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과 ‘경제적 공동체’였다는 자백을 강요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법조계와 경제계에서는 “경제적 공동체 혐의로 처벌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 “무리하게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을 엮으려 한다”는 등의 비판이 나왔다. 특검은 자백 강요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1년9개월 동안 50여 차례의 압수수색과 430여 차례의 임직원 소환조사를 진행하면서 정작 사건의 본류인 ‘분식회계’와는 멀어졌던 삼성바이오로직스 수사도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논란거리다.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윤석열 사단’의 수사는 잔혹하기로 유명하다”며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는 윤석열 사단이 맡은 다른 대형 사건 수사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안팎에서는 윤 전 총장이 측근인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현 정권의 수사 등으로 깨달은 바가 많았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한 검사장 수사와 관련해 현직 언론인이 ‘강요미수죄’ 명목으로 구속되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면서 언론 자유 침해 등 각종 논란이 불거졌다”며 “윤 전 총장도 정치적인 수사나 반기업 정서에 기댄 수사와 관련해 문제점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 아내 사무실 찾은 윤석열
사퇴 사흘만에 외부 활동…與野, 일거수일투족 '촉각'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7일 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4일 전격 사퇴한 뒤 처음이다. 사퇴 사흘째지만 정치권에서는 윤 전 총장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관심이 식을 줄 모른다.사퇴 사흘만에 외부 활동…與野, 일거수일투족 '촉각'
윤 전 총장은 이날 오전 서울 서초동에 있는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을 찾은 모습이 언론에 잡혔다. 코바나컨텐츠는 윤 전 총장의 부인인 김건희 씨가 운영하는 전시·공연기획사다. 윤 전 총장 자택과 이어진 주상복합건물 상가에 사무실이 있다. 법조계에선 윤 전 총장이 이곳을 사무실로 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윤 전 총장은 당분간 외부활동을 자제한 채 향후 계획을 구상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에서는 외부 강연이나 SNS 등을 통해 중대범죄수사청 입법과 관련해 어떤 방식으로든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사퇴 사흘째인 이날도 ‘윤석열’ 이름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윤 전 총장에게 많은 야권 지지자의 마음이 모여 있다”며 “성급하게 정치를 시작하기보다 국정 전반에 걸쳐 상세하게 살펴보고, 문제점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내가 만들고 싶은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떤 건지 비전을 열심히 준비하면 좋겠다”고 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문재인 정부는) 윤 전 총장을 1년에 걸쳐 두들겨 패서 쫓아냈다”며 “어느 정신 나간 검사가 LH(한국토지주택공사)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겠다고 나서겠느냐”고 비판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나는 ‘윤석열 검찰’이 2019년 하반기 문재인 정부를 ‘살아있는 권력’이 아니라 ‘곧 죽을 권력’으로 판단했고, 방향 전환을 결정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