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균일하게 여러 겹 쌓아올린 캔버스 위로 굵은 나무줄기가 힘차게 뻗어 나간다. 흙과 붓질이 만들어낸 질감은 그 어떤 터치보다 강렬하게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뿜어낸다. 그 위에 얹힌 여린 매화 꽃잎의 아름다움이 역설적이다. 긴 겨울이 끝나고 있음을, 모두가 간절하게 기다려온 봄날이 문턱까지 달려왔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입춘을 하루 앞둔 2일, 화가 임옥상(71)이 이른 봄기운을 들고 찾아왔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나우에서 이날 개막한 개인전 ‘나는 나무다’에서다. 매화나무를 비롯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을 그린 나무 그림 40여 점을 걸었다. 나무에 따라 때로는 굵고 힘차게, 때로는 날카롭고 세밀하게 터치감을 살렸다.
임옥상은 ‘민중미술 1세대’로 꼽힌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래 예술을 통해 사회 이슈에 목소리를 내왔다. 붓과 화폭, 흙과 종이, 철이 그가 가진 마이크였다. 하지만 그의 50년 작품세계를 민중미술만으로 규정하기엔 너무나 부족하다. 임옥상은 “미술은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예술인 만큼 지평이 넓어야 한다”며 “어떤 규정에 속박되지 않고 ‘내 마음대로 그린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어왔다”고 했다. 민중미술로 분류되는 작품은 그의 일부일 뿐 전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내세운 것은 나무다. 전시 제목처럼 임옥상에게 나무는 그 자신이다. 그가 나무를 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70년대 초, 서울대 미대 회화과 졸업을 앞두고 미래를 고민하던 때 그가 떠올린 것은 고향인 충남 부여군 상근리에 있던 커다란 당산나무였다. 서낭당으로서 마을 주민들의 놀이터이자 휴식처였던 나무의 품은 얼마나 넉넉하고 너그러웠던가. 낯선 서울, 불확실한 미래로 떠돌던 그는 고향을 찾아 한 달간 머물며 그때 그 당산나무를 그렸다.
그가 또다시 나무를 떠올린 것은 몇 년 뒤였다. 군부 독재와 이데올로기 정쟁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한국에서의 터전을 버리고 이민, 유학 대열에 올랐을 때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는 거꾸로 이 땅에 한 그루의 나무가 돼 뿌리 박고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좌우명을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로 정한 것도 이때다.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어도 그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기는 것처럼, 덕(德)이 있으면 사람들이 절로 따른다는 뜻이다.
“나무는 뽐내지 않습니다. 흔들리지도, 푸념하지도 않고 의연하지요.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몸을 맡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타고 춤을 춥니다. 변화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 그 자체죠.”
이번 전시의 중심이 된 나무 연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약 3년 전부터다.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70세)’을 앞두고 나무의 굳건한 생명력과 너그러움에 다시 한번 주목했다.
사계절의 다양한 풍경을 담은 60점을 가로 3.9m, 세로 1.3m로 구성한 나무 연작, 나무와 흙의 무게에 화려한 매화로 화폭 가득 생기를 불어넣은 매화 연작은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생명력을 뿜어낸다. 화폭을 가득 채운 매화 꽃잎은 코로나19로 인한 피로나 일상의 무게도 잠시 잊게 한다.
“매화는 긴 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첫 번째 신호입니다. 그래서 심매도(尋梅圖)는 새해를 맞는 저의 통과의례지요. 이번 작품으로 봄을 기다려온 분들에게 새 생명이 움터나오는 반가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전시는 오는 28일까지.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