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원주에서 남의 건물 앞에 댄 차를 빼달라고 했더니 “어디서 공직자에게 대드냐”고 공무원이 욕설을 퍼부었다. 정의당 대표 성추행 사건을 놓고 미투 진원지인 거대 여당은 “충격을 넘어 참담하다”는 논평을 냈다. “감히 명을 거역”이라던 법무부 장관의 추상같은 일갈과 함께, 우리는 아직 조선시대를 사는 것 같다. 관존민비에다 위선과 차별의 전근대적 양반 DNA가 한국 사회에 아직 뿌리 깊다. 사소한 권한도 ‘갑질 면허증’인 줄 알고, 후안무치는 끝이 없다.
무려 519년을 존속한 조선은 세계 최장수 왕조다. 중국 명·청과 일본 에도막부가 300년을 못 갔고, 유럽은 더 짧았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며 진작 망했을 왕조가 유교 원리주의로 연명한 결과다. ‘양반들의 나라’에선 차별과 억압이 일상이었다. 양반과 상민(班常), 양인과 천민(良賤), 적자와 서자(嫡庶)에다 남녀·지역·직업까지 차별은 철저하고 중층적이었다.
특히 노비는 재산 취급했다. 노비를 세는 단위는 인(人)·명(名)이 아니라 ‘구(口)’다. 17세기 조선 인구의 약 40%를 차지했던 노비는 미국 흑인노예보다 비중이 높았다는 주장도 있다. 오죽하면 율곡 이이가 1574년 상소문에서 “동족을 이렇게 많이 노비로 부리며 사고파는 나라가 동서고금에 또 어디 있는가”라고 개탄했다.
하지만 신사임당은 친정어머니에게서 노비 30여 명을 물려받아 119명으로 불려 율곡 등 슬하 7남매에게 나눠줬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卽賤)’의 결과다. “부귀가 음탕을 부른다”고 가르친 퇴계 이황도 엄청난 자산가였다. 그의 외아들 이준이 남긴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땅 36만 평, 노비 367명에 이른다.
지독한 차별은 그만큼의 특권이 있음을 뜻한다. 토지 관직 지식을 독점한 양반은 조선 후기에 ‘착취의 끝판왕’으로 군림했다. 19세기 ‘민란의 시대’는 짓밟히던 민초들이 꿈틀한 것이다. 그러니 국외자들의 눈에 양반은 ‘모든 악의 근원’(량치차오《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도덕+권력+부’(오구라 기조《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허가받은 흡혈귀’(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로 비칠 만했다.
6세기에 걸쳐 있는 조선이니 그 정신적 잔재가 간단히 사라질 리 없다. 지금도 실질과 능률보다 명분과 체면을 앞세우지 않는가. 합리와 과학보다 미신과 음모론이 앞선다. 복잡다기한 현실을 선과 악으로 재단하는 도덕지향적 사고는 요즘 착한 임대료, 착한 이자 같은 ‘착한 시리즈’로 이어진다.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인상 역시 ‘좋은 의도 나쁜 결과’의 전형이다. 국회에 쌓인 수천 건의 규제법안에 적힌 ‘입법 취지’대로만 된다면 유토피아가 따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그러면서 인재풀은 붕당(朋黨)에 갇히고, 세금은 합법적 약탈로 치닫는다.
입으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되뇐 양반계급의 통치 수단은 잔인하고 가혹한 처벌이었다. ‘오라질(오랏줄에 묶일), 육시랄(부관참시할), 경을 칠(이마에 죄명을 새길)’ 등 형벌이 욕설이 된 나라가 조선이다. 요즘 기업인에 대한 과잉 형사처벌 법률이 쏟아지는 게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문제가 터지면 원인과 해법을 제쳐놓고 사람만 강력 처벌하는 걸로 끝내는 관행도 양반의 유물 아닐까.
양반은 도덕정치 뒤에 욕망과 특권을 숨기는 데도 능했다. 노비 수천을 거느린 고관대작이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읊는 위선이 다반사였다. 오늘날 강남좌파 집권세력이 “모두 강남 살 필요는 없다” “개천에서 가재 붕어 개구리도 행복한 세상” 운운한 게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조선식 사농공상의 서열의식은 여전히 강고하다. 조선 지배층이 상공인을 손볼 대상으로 간주했듯이, 사림 양반을 닮은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재벌 개혁’을 외친다. 국가대표 기업들이 글로벌 초격차를 벌리고 있지만 한국의 정치인은 아직도 ‘안방 여포’ 수준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개혁한다는 말인가.
조선은 가난한 정체 사회였기에 정쟁과 착취가 더 격렬했다. 세계 변화와 담쌓은 폐쇄계 사고방식에 갇혀 망했다. 조선처럼 정치가 나라의 미래를 가불(假拂)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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