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편지를 써본 지가 까마득하다.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신호’를 주고받는 세상이 돼 버린 탓일까. 오가는 새해 덕담마저 혼잣말 같은 요즘에는 ‘편지’라는 ‘인간의 형식’이 폐기처분된 듯하다.
내게 독일소설을 가르쳐주신 교수님은 소설가셨다. 한 시절 지독한 비관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나는 스승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더랬다. 필요한 말만 적혀 있음에도 많은 것들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였다. 그는 자신이 근래 겪은 ‘어떤 일’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가 한 해를 꼬박 공들여 완성한 장편소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게 그 처음이었다. 파일은 복구되지 않았고 종이원고도 없었다. 지금이라면 무슨 뾰족한 수를 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십이삼 년 전 당시에는 그런 사고수습에 용이한 여건도, 능란한 사람도 극히 희귀했다. 오랫동안 심혈을 다 바쳐 창작해낸 책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증발해버렸을 때의 상태란 실망이 아니라 절망이다.
스승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고, 거울 속에서 덫에 걸린 채 죽어가는 짐승 같은 한 남자를 마주하니 문득 마음의 저 어두운 밑바닥으로부터 작은 목소리가 들리더란다. 그 음성에 힘입어, 무작정 그는 없어져버린 그 장편소설을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석 달 만에 그 장편소설을 다시금 탈고했을 때, 내 스승은 두 가지 엄연한 사실 앞에 서 있게 되었다고 했다.
첫째, 다시 탈고한 지금의 작품이, 허공으로 흩어져버린 그 작품보다 훨씬 낫더라는 것. 그냥 복원된 정도가 아니라 만약 이러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싶게 ‘업그레이드’돼 있더라는 점. 둘째, 그 장편소설의 작업소요일은 1년에서 1년이 보태진 2년이 아니라, 전부 15개월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 작품을 1년 하고도 3개월 동안 ‘완성’한 거였다. 스승은 쓰러져 있는 나를 추궁이나 명령 같은 ‘신호’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로 일으켜세우려 하고 있었다. 우리가 삶에서 겪게 되는 문제들이란 대부분 그러하다면서 말이다.
내 청춘이 기운을 회복한 것이 오로지 그것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그때부터 시련과 좌절이 닥치면 항상 내 스승의 그 편지를 떠올린다. 그러면 어느새 내 마음의 저 어두운 밑바닥으로부터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너의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네가 절망하고 있는 그 절망은 네가 지금 겁먹고 있는 그것과는 한참 다르며 사실은 악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라고. 막상 부딪혀보면 있으나마나 한 것이라고. 네가 없애면 없어진다고. 이렇게 절망을 이긴 사람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로하는 능력까지 얻게 된다고. 자칫 ‘위로’는 마약 노릇이 되지만, ‘지혜로서의 위로’는 ‘치유’가 된다고. ‘도전’이 된다고. 계속 이런 말들을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세상의 기준에서 내 스승은 보잘것없는 문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본분, 소설 쓰는 것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문학을 그 어느 위대한 문호보다 즐거워했다. 스승은 내게 그 편지를 선물로 준 뒤 몇 해가 지나지 않아 간암으로 별세했다. 어느새 나는 얼추 그때 그의 나이가 됐다. 스승의 몸이 사라졌듯이 이제 그의 문학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악하고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고 고약한 전염병이 우리를 아무리 괴롭힌들 나는 아직도 내 스승 같은 이들이 이 세상을 지키며 보듬는다고 믿는다. 잘 보이지 않는 조용한 사람들이.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들에게 내 스승의 편지를 이어받아 전하는 ‘나의 편지’다. 어쩌면 사회나 나라라는 것도 이런 것인지 모른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인간 주제에 아무것도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그만큼 인간과 세상이란 나약하고 부조리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새로운 날들에 해야 하는 약속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약속,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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