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모를 반드시 착용하시오’라는 문구가 건설현장 곳곳에 붙어 있고, 안전모 관련 지시가 수차례 내려졌다. 그런데도 한 근로자가 이를 무시해 안전모를 벗었다가 부상이나 사망 사고를 당하면 사업주까지 처벌 대상이 된다. 해당 건설 공사를 발주한 도급인도 마찬가지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과 중대재해법 제정에 따른 것이다. 오는 4월부터는 법정 형량도 큰 폭으로 늘어난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형량 기준을 대폭 높였다. 법조계와 산업계에선 ‘사후약방문식으로 이중으로 엄벌만 강조할 게 아니라 실질적인 예방법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을 계속 내놓고 있다.
“사망 사고 발생, 최대 10년6개월”
지난 8일 중대재해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데 이어 12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산안법의 양형 기준을 상향했다고 밝혔다. 죄질이 좋지 않은 경우에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7년까지, 같은 사고가 발생하는 ‘다수범’, 혹은 ‘5년 내 재범’ 영역에 들어가면 법정 최고형의 2분의 1까지 가중처벌해 최대 징역 10년6개월까지 선고가 가능하다.구체적으로 기본 양형 기준은 기존 6개월~1년6개월에서 1년~2년6개월로 상향됐다. 가중영역은 기존 10개월~3년6개월에서 2~5년으로, 특별가중영역은 기존 10개월~5년3개월에서 2~7년으로 강화됐다. 다수범은 기존 10개월~7년10개월15일에서 2년~10년6개월로 상향됐다. 5년 내 재범 관련 규정은 이번에 신설됐다.
가중·감경 요인을 살펴보면 우선 자수나 내부 고발은 ‘특별감경’에 해당한다. 수사에 협조하면 형을 깎아줄 수 있다는 뜻이다. ‘상당 금액 공탁’은 감경 요인에서 빠졌다. 이외 ‘유사한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다수 피해자가 발생한 경우’는 특별가중 요인에 해당한다. 사고의 반복성과 규모 모두 주요한 양형 참작 사유로 보겠다는 뜻이다.
양형위는 지난 11일 회의에서 중대재해법에 관한 논의를 하기도 했지만 시행 시기가 공포 후 1년 뒤라는 점을 고려해 당장 양형 기준을 정하지는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산안법 양형 기준 수정과 관련된 논의는 지난해 7월부터 계속돼 온 것”이라며 “중대재해법 통과 분위기에 맞물려 양형 기준을 올린 것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엄벌 아닌 구체적 예방조치 마련해야”
법조계 안팎에선 산업현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처벌만 강화해 나가는 방향이 옳은지 의문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산안법도 중대재해법과 마찬가지로 사업주나 현장관리자에 대한 의무를 구체화하지 못한 모호한 법안”이라며 “사업주, 최고경영자(CEO), 안전관리책임자, 현장관리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수해야 하는지 의무체계를 명확히 하지 않는 이상 예방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후약방문식으로 엄벌만 논의하면 안 된다”며 “형량도 형량이지만 사업주에게 어떤 의무를 지울 것인지, 정확히 어떤 행위가 범죄인 것인지 명확히 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상철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산업현장에서 일어나는 사망 사고는 고의가 아니라 과실에 의해 발생하는 ‘과실범’적 성격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며 “그럼에도 무거운 양형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산업안전 관리를 전문 분야로 하는 또 다른 변호사는 “산업 현장에서 형량이 1년, 2년 오르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라며 “규모가 있는 건설현장에서 현장소장이 모든 일을 다 알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사고 예방을 위한 조치들은 얼마든지 바람직하지만 계속해서 처벌만 강화하는 방향이 옳은지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중대재해법이 통과된 지 며칠이 안 됐는데 산안법 양형 기준까지 과도하게 올려 기업들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남정민/이인혁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