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 있는 프리미엄아울렛에 갔을 때의 일이다. 딱히 물건을 사겠다는 의지 없이,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 나이키 매장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곳에 골프화가 진열돼 있었다. ‘그래, 신발 살 때가 되긴 했는데…’ 잠시 흔들리는 눈빛을 금새 읽었는지, 매장 점원이 한 마디를 날렸다. “보고 계신 신발 유명한 거에요. 정용진 부회장님이 직접 사서 필드에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그 날 필자는 예정에도 없던 쇼핑을 하고 말았다.
그 날의 쇼핑 심리에 가장 큰 작용을 한 것은 누가 뭐래도 ‘정용진’이라는 가상의 브랜드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날 머리 속엔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재계 총수가 직접 사서 신을 정도로 품질이 좋은 모양인데, 가격도 생각보다 괜찮네’
정용진 부회장이 만든 이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는 그의 전매특허인 SNS 소통 덕분일 것이다. 정 부회장은 페이스북이 처음 국내에 소개됐을 무렵부터 자신만의 계정을 운영했다. 당시 신세계 커뮤니케이션실에서 ‘오너’가 직접 SNS 계정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건의까지 했지만, 정 부회장은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일상을 대중과 공유했다. 최근엔 유명 방송인인 백종원과 ‘콜라보’를 이뤄 농수산물을 완판하는가 하면, 유튜브를 통해서도 재미있는 영상을 만들어 ‘소탈한 재벌’이란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렵겠지만 ‘정용진’ 브랜드가 이마트와 SSG닷컴, 신세계프리미엄아울렛 등의 매출에 기여하는 바는 상당할 것이다.
흥미로운 건 정 부회장의 SNS 소통이 거의 ‘1인극’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룹 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의 도움이나 협의없이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최근 들어 정 부회장이 언급한 상품들이 대박을 치면서 이마트 마케팅 담당자들과 협의가 이뤄지는 것으로 전해들었다”며 “다만, 기업과 브랜드 이미지를 관리하는 홍보실과는 어떤 협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신세계의 그룹 문화를 감안하면 정 부회장의 ‘나 홀로 소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정 부회장의 모친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재계에서도 잘 알려진 ‘은둔의 경영자’다.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총괄사장 역시 외부에 일상을 공개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편이다.
역설적이게도 정 부회장의 ‘브랜드 가치’가 입증될 수 있던 것은 이 같은 자연스러움 덕분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이미지 대신에 정 부회장은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필터’없이 보여줌으로써 진솔하고, 소탈하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이는 최근 거센 역풍을 불고 온 유튜버 뒷광고에 대해 대중들이 거부감을 표출한 것과 비슷하다. 한국의 대중들은 가식없고, 자연스러운 무언가를 훨씬 선호한다. 중국의 ‘왕홍’들이 대놓고 협찬과 광고로 도배하면서도 온라인 쇼핑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왕홍이란 ‘쇼호스트에 크리에이터, BJ 등을 합친 중국판 인플루언서다.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는 정 부회장의 ‘1인극’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냐다. 다시 말해, 이마트로선 그룹 차원의 PI(President Identity) 전략을 고민해봐야할 시점이 됐다는 얘기다. 피아노 독주도 오케스트라의 후원을 받으면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이와 관련해 유통업계에선 지난해 10월 이마트의 인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 부회장은 상무급인 실장을 외부 인사로 교체하는 등 그룹 홍보실 조직을 대폭 개편했다. 당시 유통업계에선 기존 임원들을 SSG닷컴, 편의점인 이마트24에 보냄으로써 이마트의 향후 먹거리가 될 핵심 계열사 2곳을 키우기 위한 전략이란 평가가 나왔다. 신임 홍보실 임원이 CJ그룹에서 대관 경험을 갖고 있고, MB 청와대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는 것에 비춰 향후 이마트의 대외업무 능력을 키우려는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해석은 정 부회장이 체계화된 PI 전략을 주문했다는 설(說)이다.
PI는 그동안 재계에서보다는 대통령 등 정치의 영역에서 더 각광을 받았다. 청와대가 PI 전략을 외부 전문가를 통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다. 지금은 폐지된 국정홍보처가 그 역할을 맡았다. 한때 노벨평화상을 받도록 하기 위해 PI 전략을 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당시 청와대는 대통령의 이미지와 국정 철학에 관한 정체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문재인 청와대’도 최근 PI 컨설팅 회사에 대한 공개 입찰을 진행하기도 했다. 입찰 조건에 ‘국민 건강 증진 홍보에 경력을 갖고 있는 곳’ 등 정책 홍보를 강조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정치권에선 문재인 대통령의 탈(脫)정치 논란이 일기도 했다. 현 청와대는 대통령 PI를 역대 어느 정부보다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집권 초기에 흙먼지 묻은 구두를 신고, 격의없이 비서진과 커피를 마시며 산책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소탈한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성공을 거뒀다.
재계는 오너 혹은 CEO에 대한 PI에 소극적인 편이었다. 득보다는 실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대표적인 것이 ‘오너 리스크’다. 그룹을 대표하는 회장이나 2,3세가 법원과 검찰을 오가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업 브랜드에 타격을 줄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대기업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적극적인 PI보다는 ‘리스크 관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많다. 위험 신호가 나오면 위기로 번지기 전에 불길을 잡는데 특화돼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최근 들어 대기업들도 적극적인 PI 전략에 나서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받는 성공 사례로는 호텔신라가 꼽힌다. 2014년 장충동 호텔신라에 상주하던 모범택시 운전자가 호텔 현관을 들이 받아 직원과 투숙객이 부상을 당하고 회전문이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는 부상자에 대한 피해 보상은 물론이고, 사고 당사자인 82세의 고령 운전자에게도 5000만원의 피해보상금을 물리지 않고 직접 찾아가 안부를 묻도록 했다. SNS에서 이 같은 선행이 전파되며 이부진 사장은 차가운 CEO라는 이미지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따뜻한 ‘오너’로 조명받았다. 당시 호텔신라 홍보실은 ‘무위(無爲)의 홍보’ 전략을 택했다. 시쳇말로 인위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하지 않음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했다.
최근엔 대한항공의 PI 전략이 주목을 받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초기 확산기였던 지난해 2월,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은 우한에 고립돼 있던 교민을 귀국시키기 위한 전세기에 동행했다. 국가적 재난에 동참하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함으로써 대한항공은 갑질 등 그간 회사에 쏟아졌던 부정적인 여론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데 성공했다. 현대자동차, LG, SK그룹 등 재계 상위 대기업들도 ‘큰 그림을 그리는 오너’라는 방향으로 그룹 PI 전략을 정교하게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마트가 ‘정용진’이란 막강한 브랜드를 어떻게 활용할 지는 유통가(街) 뿐만 아니라 마케팅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것으로 예상된다. 호텔신라처럼 ‘무위의 홍보’로 대응할 지, 아니면 좀 더 체계적인 PI 전략을 구사할 지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