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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의 공간] 1995년 시카고, 2020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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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앞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전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도시에서 자신을 지켜줄 안전망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1995년 7월 미국 시카고는 기온이 41도까지 치솟는 열대 기단이 하늘을 뒤덮었다. 체감 온도는 52도. 1주일 만에 739명이 사망했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 때보다 7배, 1871년 시카고 대화재 때보다 2배 많았다. 당시 인구통계학적 분석이 쏟아졌다. 사망률이 가장 높은 10곳 중 8곳은 사실상 흑인 거주지였고, 빈곤과 강력 범죄가 집중된 지역이었다. 당연했다. 그곳에는 노인과 환자 등 위기에 취약한 1인 가구가 많이 살고 있었다.

낯선 사실도 발견됐다. 사망률이 가장 낮은 10곳 중 3곳 역시 빈민가였다는 점이다. 시카고의 대표적 빈민가 엥글우드에선 10만 명당 33명꼴로 사망했고, 비슷한 조건의 오번그레셤에선 10만 명당 3명이 사망했다. 오번그레셤은 심지어 부유층이 사는 링컨파크나 니어노스사이드 지역보다 사망률 수치가 낮았다.
시카고 폭염 사망률의 비밀
《폭염사회》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의 저자이자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인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오번그레셤의 기적은 ‘사회적 인프라’를 잘 설계한 공간 기획 결과라고 분석한다. 엥글우드와 오번그레셤의 차이는 단 하나. 엥글우드는 지역 주민이 서로 교류하거나 접촉할 수 있는 공공시설 등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했다. 반면 오번그레셤에서는 “집 밖에 나가면 식당, 교회, 공원, 슈퍼에서 무조건 동네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주민끼리 접촉 가능한 인프라 존재 여부가 극한 상황에서 두 지역의 사망률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적어도 외부로부터 공포와 위험이 닥칠 때 연대와 협동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 극복해 왔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고 온기를 나누는 물리적 공간이 구성원을 위기에서 구했다. 사회적 인프라라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상에서 오가며 가볍게 서로 안부를 묻고 인사할 수 있는 곳들이다. 공원, 도서관, 놀이터, 학교, 체육시설, 쉼터와 텃밭 등이 그렇다. 카페나 식당, 서점 등 상업 시설도 ‘제3의 공간’으로서 비슷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인간관계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 공공시설은 물론 카페와 같은 일상 속 상업시설까지 마음대로 오갈 수 없게 됐다. 당분간 5인 이상의 사적 모임도 금지된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느 순간 내 이웃과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려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선(善)이 됐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스크를 쓰고도 서로 등 돌리고 서는 게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예절이 됐을 정도다.
코로나 이후 복원해야 할 공간
대한민국엔 지금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는, 역사상 가장 많은 1인 가구가 살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학교와 일터를 잃은 청년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도 고통을 호소한다. 동네 스포츠센터와 문화센터, 종교시설을 유일한 삶의 낙으로 삼았던 장년층과 노년층이 관계의 단절에서 겪는 우울증은 더 심각하다. 치료제와 백신 개발이 임박했다고 해도 앞으로 상당 기간 ‘위드 코로나’는 불가피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주체인 동시에, 스스로가 돌봄을 갈구하게 될지 모른다.

일부에선 코로나19가 끝이 아니며 바이러스 연쇄 창궐의 서막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실제 인류 역사상 재난은 늘 반복됐다. 그렇다면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코로나 사태로 도드라진 사회적 인프라 붕괴의 재구성이다. ‘관계’를 통해 옮겨진 코로나로 인해 단절된 그 ‘관계’들을 어떻게 복원할지, 재난 앞에 방패막이가 될 사회적 공간을 어떻게 재건축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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