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권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섭다. 예컨대 ‘기업규제 3법’은 소유권을 흔들어대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은 고위직의 권력 오·남용에 관한 수사를 무력화해 시민의 자유와 소유를 불안하게 함에도 그런 입법으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은 대선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 정부를 구성했고, 총선에서 다수의 지지표를 얻었다. 선거는 민주의 본질이다. 선거를 민주의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민주란 정부를 선택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민주에는 자유·평등이라는 내재적 가치가 없다. 민주는 다수의 지배일 뿐이다.
그런 민주는 개혁가들의 열정과 야심을 충족할 수 없다. 그들이 민주를 찬사의 언어로 사용했던 이유다. 재분배·복지 확대는 좋은 것, 그래서 민주고 탈규제와 복지 축소는 반(反)민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정부는 자신의 권력을 제한 없이 확대하는 게 시민들에게 유익하다고 선전했다. ‘더 많은 민주주의’가 목표인 것이다. 이것은 ‘교조적 민주주의’가 아니던가!
해고·실업자도 주인이 되는 노조공화국을 만드는 노동조합법 개정, 거주이전의 자유까지 빼앗은 부동산 규제 등 집권층이 끊임없이 경제규제를 찍어 내는 것도 민주가 목표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적 영역을 엄격히 줄여서 국가권력을 제한해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게 자유주의의 목표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이 자유주의의 모토인 이유다.
국가권력을 무제한 허용해도 된다는 교조주의 인식을 뒷받침한 게 다수의 지지를 받은 민주정부는 지적으로 현명하고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낭만적인 국가관이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문재인 정부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다수의 지지를 받은 정부의 정책은 진리·법·정의라는 교조주의 탓이다.
그런 낭만적 인식이 파괴적으로 작동한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혁명과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였다. 개인의 자유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혁명을 이끌려는 노력이 실패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어떤 장치도 국민의 이름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다수의 결정이라고 해도 이게 사회를 편가르기 하는 내용의 법이라면 법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법이 아니다. 정치적 중립·독립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한국의 정치사회를 격심한 편가르기로 몰고 갈지도 모를 공수처법, 역사 해석에까지 국가독점을 허용해 사회 전반을 네편 내편으로 가를 위험성이 있는 ‘5·18 왜곡금지법’, 대기업과 중소기업, 경영자와 근로자의 대립을 부추기는 내용의 유통산업발전법, 고용보험법 등 편가르기 입법과 정책의 예는 차고 넘친다.
이같이 국가권력을 무제한 허용하는 교조적 민주주의에는 적(敵)과 친구의 구분이 필연이다. 적으로 낙인찍히거나, 적폐로 몰린 반대파가 집권하게 되면 현재의 집권층에 다양한 방식으로 보복할 것이다. 민주권력을 무제한 허용하는 사회는 보복의 연속이다. 이를 막아내기 위해 민주라는 이름으로 온갖 수단을 모색한다. 통상적인 도덕적 가치를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정권 교체를 막기 위해 언론 탄압은 물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 정권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보복하지 못하도록 자기 사람 대못 박기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최후의 방법은 선거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독재, 이게 민주정부에 무제한의 권력을 허용한 최종 결과다. 민주주의가 살아남으려면 첫째, 민주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한다. 그런 민주가 봉사하는 건 ‘목적으로서의 자유주의’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리를 적용할 공적 영역을 정한다. 둘째, 민주주의는 정의이고 법이고 진리라는 자만을 버려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자만심은 시민에게 얼마나 많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가! 셋째, 정부보다 시장질서가 우월하다는 통찰과 번영을 위한 시장의 기능 역량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보편·추상적 성격의 정의로운 행동규칙이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그런 행동규칙으로 구성된 자유의 법에 따라 지배해야 한다는 법치가 제1의 원칙이다. 이런 원칙을 통해 다수의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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