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추진했다가 중단된 노동전문법원 신설을 재추진하기로 했다. 친노 성향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노동친화적 대법관이 늘면서 대법원이 다시 추진에 나선 것이다. 경영계에서는 노동계의 숙원사업인 노동법원이 신설되면 노조 편을 들어주는 판결이 늘고 노사 간 법정 다툼이 급증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해고자의 기업별 노조 활동을 보장하는 노조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 “가뜩이나 기울어진 노사관계가 아예 뒤집어질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지난 9월 말 열린 사법행정자문회의에서 ‘전문법원 추가 설치 여부 및 우선순위’를 안건으로 올려 논의한 뒤 노동법원 신설을 우선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법행정자문회의 내 사법정책분과위는 “필요한 전문성의 정도, 별도 법원 설치 필요성 등을 종합 고려할 때 우선적으로 노동법원과 해사법원(해상사건 전문법원)의 추가 설치를 추진함이 상당하다”며 “향후 추진을 위한 구체적 노력을 법원행정처에서 진행한다”고 했다.
노동법원은 말 그대로 노동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법원이다. 국내에서는 일반 민·형사사건과 달리 노동사건이 지니는 특수성을 감안해 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원이 있어야 한다고 노동계가 주장하면서 도입 논의가 시작됐다. 노동계는 부당해고, 부당노동행위 등 노동 관련 구제 절차가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5심제여서 소송이 장기화하는 문제를 해결해기 위해선 노동법원 설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법원의 순환보직 시스템 아래서 재판부가 노동법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더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경영계는 물론 정부도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중앙노동위원회 관계자는 “노동법원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신속·전문성은 법원이 노동위원회를 따라올 수 없다”고 말했다.
親勞 정부에 노동법원까지…경영계 '설상가상'
노동법원 신설 논의가 시작된 것은 2004년이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이 ‘군불’을 때고 이듬해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가 논의를 이어받았다. 노동계는 반겼지만 경영계는 물론 정부도 반대 의견을 내면서 사실상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후 16년간 별다른 논의가 없다가 다시 얘기가 나오는 것은 친노 성향 정부에서 대법원도 노동친화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경영계에선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하는 와중에 대법원이 노동법원까지 만들면 노조 편향적인 판결이 늘고 현장에서 노사 갈등이 커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노사 분쟁 대부분 조정으로 끝나
노동법원은 가정법원 행정법원 등과 마찬가지로 노동사건을 전담하는 전문법원이다. 대법원이 16년 만에 노동법원 신설을 재추진하고 나선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 노동친화적인 대법관이 대거 포진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많다. 특히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사법개혁비서관을 지냈고 ‘노동법원 설계자’로 알려진 김선수 대법관이 재추진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알려졌다.경영계와 정부는 노동법원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노동위원회가 1953년 설립된 이후 60년 넘게 지속되면서 역할과 기능이 확립돼 자리잡은 상황임을 고려할 때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것보단 기존 시스템을 보완해 문제점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는 설명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특정 사안에 대해 판결 전문성을 높이자는 취지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전문성 제고 방안이 굳이 특수법원 신설밖에 없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중앙노동위원회 관계자도 “노사 분쟁이 법원으로 가면 1~2년, 길게는 수년이 걸리지만 노동위원회에서는 길어야 6개월”이라며 “변호사 선임료 등 노사 분쟁 해결 비용 측면에서라도 노동위원회 차원에서 끝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해 노동위원회에 접수된 사건은 1만3815건, 이 중 소송으로 비화된 사건은 639건(4.6%)에 불과하다.
사법부마저 노사 갈등 조장 우려
지난해 3월 대법원 법원행정처와 법원공무원노조는 ‘노동법원 설치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내용을 담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공무원노조법상 비교섭 사항인 ‘정책결정 사안’을 놓고 단체협약을 맺은 것을 두고 정부 안팎에서는 “특수법원 설립으로 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노사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비판이 나왔다. 국내 변호사 수가 지난해 3만 명을 넘는 등 법조시장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판사들은 법원 내 자리를 늘리고, 그에 따라 법원 공무원의 안정적인 일자리도 증가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비판이었다.노동법원 신설을 놓고 경영계에서는 행정부에 이어 사법부마저 친노조 성향을 강화하면서 산업현장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연내 최우선 입법 과제로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된 노조3법(노조법, 공무원노조법, 교원노조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실직·해고자의 기업별 노조 가입 허용 △공무원의 노조 가입 직급제한 폐지 △노조 전임자에 대한 급여 지급 금지 규정 삭제 등이다.
이 가운데 해직 교원의 노조 활동을 보장하는 교원노조법 개정안은 지난 9월 대법원이 전국교직원노조에 대한 정부의 법외노조 통보를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사실상 입법 가이드라인을 줬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정부는 노조법을 바꿔 해고자의 기업별 노조 활동을 보장하겠다고 하고, 대법원은 노사 분쟁을 조정이 아니라 소송으로 해결하라고 하는 꼴”이라며 “어떤 연유에서든 지금 같은 시기에 노동법원 설립 논의는 부적절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