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웃는 얼굴이 각각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 있다. 언뜻 보면 사진 같지만 사실은 영상 작품이다. 표정의 변화가 극도로 느리게 일어나서 자세히 봐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1분 길이 영상을 무려 81분 동안 재생하기 때문이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비디오 아트 거장 빌 비올라(69·사진)의 2000년 영상 작품 ‘아니마’다.
‘아니마’의 등장 인물들은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등 네 가지 감정을 연속적으로 표현한다. 극도로 느린 시간의 흐름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을 표정의 미세한 변화를 볼 수 있게 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말처럼 인위적으로 제어한 ‘극도의 느림’은 각각의 감정에 이입하거나 몰입하도록 이끈다.
내년 4월 4일까지 이어지는 부산시립미술관의 기획전 ‘빌 비올라, 조우’는 비올라가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제작한 200여 점의 작품 중 영상 및 영상설치 등 대표작 16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비올라는 1970년대 초 에버슨미술관에서 비디오 테크니션으로 일하면서 백남준을 비롯한 대가들을 만났다. 선불교, 이슬람 수피즘, 기독교 신비주의 등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명상적인 동양사상을 바탕에 깔고 인간과 자연, 우주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주목받아왔다. 그가 ‘현대미술의 영상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비올라 특유의 ‘느림의 미학’을 구축한 것도 1980년 일본에서 선불교를 만나면서였다.
이번 전시 장소는 두 군데다. 부산시립미술관이 2015년 별관으로 마련한 ‘이우환 공간’에서는 1976년작 ‘이주’를 비롯해 ‘투영하는 연못’(1977~1979), ‘엘제리드호(빛과 열의 초상)’(1979) 등 초기작을 선보이고 있다.
1995년부터 2014년까지의 작품은 미술관 본관 3층의 큰 전시실 4개에 펼쳐져 있다.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인사’는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폰토르모의 그림 ‘방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 동정녀 마리아가 사촌에게 수태 사실을 알리는 내용인데, 45초 동안의 사건을 10분에 걸쳐 보여준다. 세 여성이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극도의 슬로 모션으로 보여줌으로써 무의식적인 몸짓과 순간적인 눈빛이 마치 정교한 안무처럼 느껴진다. 사건에 대한 설명 없이 사람들의 슬픈 표정만 느린 화면으로 보여줌으로써 관심을 극대화하는 2002년작 ‘관찰’, 다섯 명의 남녀가 짓는 고통스러운 표정의 슬로 모션을 통해 시간이 정지된 주관적, 심리적 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2000년작 ‘놀라움의 5중주’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에 ‘물의 장벽’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린 시절 익사할 뻔했던 경험 때문이다. 옷을 입은 남자가 물웅덩이에 뛰어드는 모습을 다섯 개의 비디오로 보여주는 ‘밀레니엄의 다섯 천사’(2001), 빛과 물의 세례를 통해 삶과 죽음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이노센츠’(2007), 삶과 죽음을 초월한 세계에서 이뤄지는 남녀의 사랑을 다룬 ‘밤의 기도’가 대표적이다.
시간을 극도로 느리게 제어한 비올라의 작품을 다 보려면 6시간 가까이 걸린다.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지만 여기서 얻는 공감과 통찰이 이를 보상한다. 시간의 속도를 늦춰 현실 너머의 세계를 보게 하는 비올라의 예술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