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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한글에 담은 혁신·상생 정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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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한글에 담은 혁신·상생 정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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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탄생한 글자다. 동시에 인류의 지적 성장, 향상된 사고능력, 과학의 발전, 진보된 사상(인간주의)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특히 개인이 목적의식을 갖고 단기간에 창작한 글자란 점에 주목을 받는다. ‘표음문자’여서 학습이 쉽고 사용에 편리하다. 논리적인 음운체계 덕운에 사용자가 수리적인 사고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가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구조와 제정 방식에 관심이 많다.
홍익인간 사상과 ‘3의 논리’
나는 역사학자로서 한글을 창조한 목적이 궁금하다. 세종은 세상을 변혁시킬 능력을 소유한 최고의 권력자였다. 국가경영자인 동시에 뛰어난 학자였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에 그의 사상과 구현한 방식(논리)이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이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표현됐다. 1446년에 반포한 훈민정음의 해례에는 목적을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했다. 당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이두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사정을 ‘어엿비’ 여긴 ‘어린 백성(愚民)’은 그리스나 로마의 특수한 시민이나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등장한 신사(부르주아지)가 아니었다.

세종의 정책 근간은 백성의 생활편의와 풍족함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농사에 도움을 준 점, 조세를 ‘감면’해 ‘공평화’를 도모한 점에서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의창’, ‘혜민서’, ‘활인서’ 등을 설치해 백성의 굶주림과 질병을 치료했다. 당시 이미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는 법까지 제정했다. 이러한 세종은 모든 백성이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감정과 의사를 솔직하고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기호(code)’를 가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세종이 혁신적인 인간주의와 실천을 추진하게 만든 힘과 사상은 무엇일까? 뛰어난 성리학자였므로 그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훈민정음 해례에도 ‘태극도설’, ‘음양오행설’ 등의 강한 연관성을 표현하고,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송학사상’의 영향도 거론한다.(강신항 《훈민정음 연구》) 하지만 세조 3년에 내린 소위 ‘구서령’에서 확인하듯, 그 시대에는 『고조선비사』, 『조대기(朝代記)』 등을 비롯해 역사 및 전통신앙과 연관된 책들이 많았다. 단군 의식이 강하고 다독가였던 세종이 가졌던 인본사상의 근저에는 ‘홍익인간’이 집약된 우리사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한글은 체계의 독창성과 탁월함 때문에 ‘옛글자설’, ‘파스타 문자설’, 심지어는 ‘창살설’ 등 모방성들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한글은 상징문자나 표의문자가 아니라 표음문자이다. 말을 만드는 이빨(齒)·혀(舌)·목구멍(咽喉) 등 발성기관의 형태를 차용하고, 28개의 기호를 초성음·중성음·종성음으로 구분한 후 각각 순서와 비율을 계산해 조합했다. 따라서 조합 능력이 향상된 현대문명에 가장 적합하고 우수한 컴퓨터 언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조합에는 반드시 구성 ‘논리(logic)’와 ‘의미(meaning)’가 있다. 자음은 오음, 오성의 음상에서 확인되듯 오행사상과 연관이 깊다. 또한 필요성의 반영인지, 논리적인 필연인지 중성글자인 모음은 기본자 ‘· ㅡ ㅣ’를 기본으로 변형된다. 이는 천원(天圓)·지방(地方)·인위(人位)의 3재를 의미하고, 1·2·3 이라는 수리를 반영한다. 상용화된 문자는 사람의 가치관, 사회의 체제, 문화의 성격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명민한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해서 신조선에 인간주의, 합일과 상생의 가치관을 이식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세종은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등과 『월인천강지곡』 500여 곡을 비롯해 『석보상절』 등 불교서적에 훈민정음을 활용했다. 이후 신권(臣權)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왕들은 『훈몽자회』, 『삼강행실도』, 『소학』, 『천자문』, 의서 편찬에 훈민정음을 활용했다. 하지만 이 ‘기적의 문자’인 훈민정음은 공문서 등 국가의 공적인 역할은 못 하고, ‘언문’ ‘암글’ ‘중글’ 등의 비칭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왜 훈민정음은 왜 450여 년 만인 1894~1896년, 갑오개혁 때야 비로소 나라글로 인정받았을까?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 시대에 ‘문자’는 필수적인 기호는 아니었다. 우리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생태환경과 유별난 역사, 생물학적 특성으로 인해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매우 감성적이고, 논리나 합리적인 사고에 서툴렀고, 사회구조도 필요성이 약했다. 또한 조선은 농업 중심의 씨족공동체 사회였다. 따라서 상업·산업이 발달한 사회보다 거래와 소통이 덜 필요했고, 효율적이고 계량적인 문자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한글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성리학자는 신분적으로는 양반이고, 경제적으로 유일한 재화이며 생산수단인 토지의 소유자들이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도덕과 학문· 예술을 만들고, 보급하며 감독하는 고위 관리 또는 출세를 고대하는 예비군들이다. 더구나 사대교린 정책을 선택했고, 자의식도 부족했으므로 임금의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이들은 끝까지 한자와 한문을 고집했다.
한자의 특성과 한계

한자는 ‘동이인’들이 처음 만들어 한족이 주도했지만, 중국을 다스린 다수 종족의 역사와 문화가 합쳐지면서 완성됐다. 따라서 역사의 노정과 다양성,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비합리적인 구성 때문에 해석에 유추가 심하다. 또한 비논리적이므로 내용과 논지가 불명확하다. 따라서 사용과정에서 갈등과 오해의 발생이 불가피해 방어전략으로 유연성, 추상성, 풍부함, 깊이 등을 강조했다. 이는 중국문학, 사상, 예술의 장점으로 포장됐다. 무엇보다도 구성이 어렵고, 복잡한 글자들이 많아 많은 시간과 돈이 투자되지 않으면 습득과 활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소수 지배계급 위주의 사회와 교조적인 문화의 양산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한글을 대한 성리학자들

난 때때로 의구심을 갖는다. 조선조 학자들의 한문 실력으로 우주의 본질과 세계의 현상을 제대로 표현하고, ‘이기론(理氣論)’, ‘성정론(性情論)’ 등 형이상학적인 논쟁들을 깊이 있게 벌일 수 있었을까?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데도 서툴렀을 것이고, 이에 학문·문화·예술도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농업·어업·상업·산업 등의 기술과 지식을 표현하기는 더욱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 성리학자들은 비효율적이고, 학습이 어려운 한자를 고수하면서 왜 훈민정음은 용도폐기했을까? 태생적으로 특권 세력인 그들은 항구적인 권력의 독점과 유지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우민화시키고, 자신들과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우월성을 강요할 도구로 ‘한자’라는 기호의 독점이 효율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유추에 근거한 자기 주장이 강한 교조적인 사회, 실생활을 무시하고 관념적인 지식인이 권력을 독점한 체제가 됐다. 또한 성리학과 실체가 불분명한 중국에 사대하는 독특한 나라가 됐다. 현명하고 통찰력이 강한 임금인 세종은 이러한 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를 방어할 목적의 하나로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창제했을지도 모른다. 한글은 나라의 멸망과 식민지라는 아픔을 겪고, 500년 만에 화려한 부활을 했다. 민주주의, 산업화, 정보화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맞아 표기방식의 효율성, 신속한 판단과 응용능력의 향상에 적합한 기호로 디지털 문명의 선도국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세종대왕. ‘역사의 천재’인 그는 권력의 탈취, 생산양식의 변화, 감성에 호소하는 선동이 아니라 합리적인 정책과 지식의 전수, 기호 사용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면서 이상세계를 건설하려한 진실한 혁명가였던 것 같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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