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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만 前 재무부 장관 "총상·가난 딛고 산업화에 힘 보탠 삶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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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만 前 재무부 장관 "총상·가난 딛고 산업화에 힘 보탠 삶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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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 올게요. 어머니.”

강원 북부 평강군에서 태어난 소년은 17세가 되던 해 6·25전쟁을 맞았다. 서울 수복 후 북진하는 한국군을 따라 1950년 10월 국군 학도대에 가입했다. 인근 지역을 수색하라는 임무를 받고 집을 나가려던 소년을 붙잡고 어머니는 “배고프겠다”며 찰떡 3개를 구워주셨다. 찰떡을 먹고 어머니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긴 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기억이 됐다. 인민군 잔당이 마을을 점령해 소년만 한국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홀로 남은 그는 6·25전쟁의 포화 한복판에서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공무원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재무부 이재국장(현재의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며 산업화에 힘을 보탰다. 이후 신한은행장과 재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이용만 무궁화신탁 명예회장( 87·사진)의 이야기다.

이 회장은 어린 시절 헤어진 부모님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정을 소개하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부모님전상서》(두란노)를 지난달 펴냈다. 이 회장은 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 묘소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로 묶었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 이야기하고 싶지만 6·25전쟁이 터진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통일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글로 대신했다”고 했다.

책은 10통의 편지를 묶은 형태로 구성했다. 이 회장은 전쟁 전후 북한에서 있었던 일화부터 시작했다. 북한에서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피마자 기름을 매일 한 대접씩 마셔 일부러 몸을 축나게 했던 이야기도 추억처럼 소개했다.

참전 후 죽을 고비를 넘겼던 사건까지 담았다. “춘천의 가리산에 잠복해 있던 우리 소대가 적군의 따발총 공격을 받았어요. 잠시 사격을 멈춘 사이 ‘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와 척추에 두 발을 맞고 산 아래로 몇 바퀴를 굴렀습니다.” 총상에 신음하는 그를 살린 것은 미군이었다. 이 회장은 “미군 병사 네 명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산 아래로 후송해줬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재무부 시절의 일화들도 책에 담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3년5개월간 재무부 이재국장을 맡아 ‘최장수 이재국장’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썼다. 이후 재정차관보까지 오른 그는 신군부가 들어선 뒤 갑작스레 사표를 내게 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인척이 사무실에 인사하러 왔는데 회의 중이라 장시간 기다리게 했다는 이유였다. 이 회장은 이후 신한은행장을 거쳐 민주화 이후인 1991년 재무부 장관으로 공직에 돌아왔다.

이 회장은 재무부 시절 추진한 정책 중 “상호금융법을 만들어 사채로 고생하는 국민들을 도운 일, 증시가 300포인트까지 떨어졌을 때 한국은행 자금을 투입해 주식시장을 부양한 일 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현재 정책을 만들고 있는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해달라고 하자 “노코멘트하고 싶다”고 답했다. 이 회장은 “공직에 있을 때만 해도 경제를 활성화하고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면 고용과 수출, 세금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책 방향이 다른 것 같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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