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가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으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예속에의 길(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쓰여 이후의 경제 질서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2차 대전 당시에는 영국에서 그리고 전쟁 후에는 주로 미국에서 학술 활동을 한 경제학자다. 그가 이 책을 쓴 배경이 흥미롭다. 그는 2차 대전 초기부터 강하게 주장되던 계획경제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처음에는 간단한 메모 형식의 글을 썼다. 그가 머물던 영국의 학계에는 2차 대전을 일으킨 파시즘을 자본주의가 극단적 형태로 변형돼 나타난 것으로 간주하고 그 폐해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사회주의적인 경제체계를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런던 정경대 학장이던 윌리엄 베버리지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하이에크는 처음에 그의 글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 메모를 썼고 그 메모를 확대 수정·보완해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 전반부에 유럽은 그 이전 수십 년간 이뤄진 눈부신 경제발전의 이면에 나타난 불평등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는 학자들이 많았고, 그중 일부는 마침 소비에트 등에서 정치 세력화한 마르크시즘에 대해 동경했다. 한편 2차 대전 중 전시 경제를 운영하는 데 계획경제 체계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전쟁 물자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는 시장경제의 가격 기구보다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 정부였는데 이들이 자본주의의 후손이므로 자본주의는 없어져야 하는 경제체제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파시즘이든 마르크시즘이든 전체주의를 의미하고, 이런 정치 체계 아래의 중앙통제에 의한 계획경제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원하는 재화의 소비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원 배분을 결정하는 중앙의 정책결정자에게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이에 비해 가격을 통한 시장경제는 여러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욕구와 재화 생산의 비용을 반영해 사람들이 원하는 소비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하이에크의 주장에 대해 당연히 찬성과 반대가 있었으나, 1990년쯤 발생한 동구권의 몰락은 일단 계획경제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시장경제보다 열등했음을 의미하고 하이에크의 주장이 실증적으로 옳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북구 국가들이 공격적 복지제도를 수행하면서도 성장을 유지하는 것이 하이에크 주장의 오류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하이에크가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한 결과다.
요즘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을 보면 하이에크가 이 책을 출판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사람들의 생각을 돌이켜 보게 한다. 여기저기서 사회의 불평등이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주장이 나오고, 전염병 사태로 인해 정부의 간섭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금 경제의 문제점이 이전 우파 정부의 잘못 때문이라는 주장은 2차 대전을 일으킨 주범이 자본주의의 변형인 파시즘이므로 자본주의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주장을 생각하게 한다.
하이에크 시대에 사회주의를 동경하던 사람들은 진심으로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선의가 그른 생각을 옳게 하지는 않는다. 위기 시 정부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과 정상 상태의 경제가 정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요즘 부동산 정책을 보면 과연 정부의 가격 상승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사람들이 원하는 주거 수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한다. 임대주택 공급을 통해 주거 수요를 만족시키고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을 잠재울 수 있다는 주장은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임대주택을 공급하려는 지역의 지자체장들과 정치인들이 그런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 자체가 정부 계획이 시장 대신 개인들의 선호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세금은 꼭 필요한 공공사업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행위를 벌하는 도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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