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 기자]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인류는 모방을 통해 발전해나간다. 한 가치가 성장하기까지 무수한 실험들과 순간을 동반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친 문화적 수단은 모두 기존의 것을 융합한 모양새며 결국 그 결과물 또한 미래적 가능성에 큰 보탬이 된다. 패션도 다를 바 없다. 새롭게 여겨졌던 양식도, 트렌드도 따져 보면 정통적 가치 안에서 색다른 조합을 이룰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트로(Newtro)’ 신드롬은 지구촌 곳곳에서 그 빛을 발하는 듯하다. 90년대 패션 아이콘 케이트 모스(Kate Moss)의 화이트 톱이 대표적 예. 그토록 쿨했던 모스의 패션을 보고 있노라면 패션계 모방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렇듯 ‘셀러브리티(Celebrity)’의 찬란함을 엿보고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누군가는 스타가 그 옷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웃돈을 주고 구입하기도 한다. 아마 셀럽 본인은 별생각 없이 카메라 앞에 섰겠지만 말이다.
문화적 콘텐츠, 특히나 영화를 통해 자신을 각인시켰다면 그 영향력은 더욱더 커진다. 주인공의 패션이 시대적 트렌드를 표현함과 동시에 성향 또한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 단순히 소품으로 시작했던 키워드를 관찰로 말미암아 인물적 평가까지 다다르게 한다. 1977년 영화 ‘애니 홀(Annie Hall)’ 속 다이안 키튼(Diane Keaton) 패션이 꼭 그렇다. 작품 내 클래식하면서도 편안한 수트 차림이 돋보이는 순간.
‘애니 홀’을 감상한 이들은 금방 눈치챘겠지만 우디 앨런(Woody Allen)의 날렵한 트위드 재킷, 다이안의 카키 컬러 카고 진, 환상적이었던 크리스마스 시밀러 룩까지 모두 ‘랄프 로렌(Ralph Lauren)’ 제품. 러닝 타임 내내 은은한 분위기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랄프 로렌의 지원 덕택일 것이다. 빈티지하면서도 프레피한 감성을 가진 그들이기에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또 다른 예시로, 21세기가 들어서고 난 후 개봉한 작품을 꺼내 보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셉템버 이슈(The September Issue)’ 같은 패션 소재 영화가 줄줄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영화는 ‘트렌드 세터(Trend Setter)’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걸작 속 패션에서 트렌드의 영감을 받는 브랜드도 있을까. 2020년에 접어든 지금, 수많은 패션 디렉터들이 스크린 안과 밖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Louis Vuitton - La La Land
앞서 ‘위플래쉬(Whiplash)’로 예열하고 ‘라라랜드(La LA Land)’에서 뜨겁게 타오른 데미언 샤젤 (Damien Chazelle). 그에게 있어 재즈 아카이브는 문화적 원동력이다. 학창 시절부터 재즈 드러머를 꿈꾸었고 음악 전문 학교에서 전문 레슨을 받은 만큼 가장 익숙한 분야일 것. 저스틴 허위츠(Justin Hurwitz)의 테마곡들은 선율을 넘어서 로맨틱하고 점잖은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그 안에서 가장 돋보였던 건 주인공들의 클래식한 차림새였다. 1971년에 문을 연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주인공들은 정갈하면서도 도회적인 패션을 소화했다. 물론 엠마 스톤(Emma Stone)의 화사한 파티 드레스도 아름다웠지만 더욱더 돋보였던 건 라이언 고슬링(Ryan Gosling)의 50년대 슈트. 고전적인 그의 입맛에 맞게 슈즈 또한 ‘윙 팁(Wing Tip)’으로 맞추었다.
Lemaire – The Pianist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된 패션을 돌이켜본다.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는 그 이름만큼이나 정통적인 디렉팅을 시도하는 듯하다. 그의 2021년 봄 맨즈웨어 컬렉션에서는 찬란하면서도 큼지막한 투 피스를 이룩했다. ‘삶과 연결된 옷’을 목표로 하는 그답게 깊이감 있는 아이템을 선정한 모습.
2002년작 ‘피아니스트(The Pianist)’ 속 에이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는 누구보다도 걸출하게 블레이저 착장을 완성했다. ‘피아니스트’는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벌여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만큼 브로디는 우울하고 비극적인 역할을 분해 고독함으로 분위기를 채웠다. 와이드한 라펠의 울 재킷, 큼직큼직한 셔츠까지 곧잘 소화한 그.
GmbH – Blade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 원작으로 오컬트적 분위기를 내뿜는 ‘블레이드(Blade)’. 영화 속 어두운 아우라의 웨슬리 스나입스(Wesley Snipes)를 보면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쥐어진다. 사실 스나입스의 패션은 실생활에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스트리트 브랜드 ‘GmbH’가 그것을 해냈다.
베를린 기반의 크루가 선보이는 GmbH는 워크웨어 실루엣을 필두로 센슈얼한 디테일을 자랑한다. 어떻게 보면 요즘 정말 흔한 슬리브리스 탑이지만 롱 레더 재킷&팬츠를 통해 한눈에 들어올 만한 세트업을 이루었다. ‘레더’라는 무겁고 두터운 소재를 통해 오히려 스포티한 콘셉트를 선보이는 그들이다.
Ermenegildo Zegna – Chunking Express
대망의 마지막은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 속 가네시로 다케시(Takeshi Kaneshiro). 많은 사람들이 ‘중경삼림’ 하면 양조위(梁朝偉)를 떠올리지만 금성무의 애절한 눈빛 또한 저버릴 수 없다. 영화가 90년대 홍콩 거리를 배경으로 다룬 만큼 곳곳에서 축 늘어진 색감이 느껴진다. ‘스텝 프린팅(Step Printing)’ 기법을 활용한 영상미는 세기말적 정취까지 은유 될 정도.
이탈리아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는 작품을 풍요롭고 대담하게 풀이했다. 금성무가 입고 있는 스트라이프 셔츠와 가벼운 코튼 재킷 등 그런지 무드의 아이템을 면면히 들여다본 시점. 필름 톤에 은은하게 비췄던 재킷 색감마저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진출처: 영화 ‘애니 홀’, ‘라라랜드’, ‘블레이드’, ‘피아니스트’, ‘중경삼림’ 스틸 컷, 보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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