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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화 대표 "국군포로 명예회복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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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화 대표 "국군포로 명예회복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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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화 씨(62·사진)는 탈북민이다. 죽으면 고향인 남녘 경남 김해 땅에 묻어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2006년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유해를 북에서 몰래 들여와 김해에 묻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위해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 포로로 붙잡힌 아버지의 공적을 인정조차 해주지 않는 정부에 맞서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를 맡고 있다.

최근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손 대표는 “정부가 국군포로와 유가족에게 너무나 무심하다”고 토로했다. 6·25전쟁 당시 국군포로는 약 8만2000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한국 땅으로 돌아온 포로는 휴전 당시 송환된 8343명에 불과하다.

손 대표는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와 그 가족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며 “휴전 이후로 국군포로 한 명 송환 못 하고, 유해 한 구 송환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심함과 무능함에 속이 무너진다”고 했다.

손 대표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손동식씨는 1950년 9월 참전해 1953년 5월 26일 포로가 됐다. 한 달에 한 번 겨우 집에 올 정도로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1984년 1월 21일 51세에 폐암에 걸려 숨졌다고 한다. 손 대표는 “고향을 그리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말 한마디 없이 우시곤 했다”며 “돌아가시던 날까지도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탈북했다”고 말했다.

한국 국방부는 한국을 위해 싸운 아버지의 지난날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국방부가 행적이 불분명한 국군포로를 모두 1951년에 전사한 것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손 대표는 1962년생인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국방부의 행정 오류를 수정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유해와 자신의 DNA를 비교 감식해 친족 관계를 확인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손 대표와 아버지의 친족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법으로 다퉈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사이버대를 다니며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변호사 한 명 선임하지 않고 혼자 가정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손동식이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아버지의 사망 날짜가 1951년이 아니라 1984년임을 확인받았다.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요지부동이다. 여전히 손동식 명의의 병적증명서를 발급하면 사망 시기가 1951년으로 기재돼 있다. 국방부에 따르면 손 대표는 손동식의 ‘추정 자녀’일 뿐이다.

손 대표는 “법 따로, 사람 따로, 행정 따로 가는 이 나라가 무슨 법치주의 국가이고 민주주의 국가냐”며 “아버지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는 날까지 정부와 법적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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