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대륙과 중국이라는 강대국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숙명을 가진 한민족. 우리는 승리·굴복·공존 등 세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만주를 잃고 한반도로 축소된 후에는 굴복과 공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많았다.
고려는 등거리 외교와 활발한 무역을 바탕으로 분열된 중국과 공존해 왔다. 하지만 몽골의 등장으로 공존과 굴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정부는 강화로 천도했다.
고려의 천도, 항전인가 도피인가
고려의 강화 천도 사건은 다시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 정부의 정통성 문제, 우리가 외세를 대하는 방식 등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고려와 몽골의 갈등은 1225년에 사신으로 온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1231년에 1차 침입이 있었다. 이후 몽골은 내정을 간섭하고, 압박을 가해 무신정권은 천도를 제의했다. 당시 화의론을 주장하는 반대론자와 찬성론자 간의 격론이 있었다. 대부분은 반대했으나 실권자인 최우의 힘으로 고종과 정부는 1232년 7월 6일에 강화로 천도했다. 출륙하는 1270년까지 38년 동안 몽골은 고려를 총 9차례 공격했다. 강화천도를 몽골의 고압적인 태도와 과중한 경제적 보상, 군사의 파병과 군비의 조달, 그리고 정치적인 간섭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명분보다 더 중요한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강화 천도의 실질적인 이유와 배경
첫째, 강화도는 수전능력이 약한 몽골의 공격을 방어하며 장기간 항전하는 데 유리하다.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복잡해서 외부세력이 근접하기 힘든 지형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몽골군은 배를 만들어 강도를 공격하려는 시도를 몇 번 했으나 효과적이지 못했다. (윤용혁, 《고려대몽항쟁사 연구》) 하지만 그 주장은 일부만 맞을 뿐이다. 강화수로는 폭이 매우 좁고, 밀물과 썰물을 이용할 수 있어 도강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몽골군은 절대 수전에 약하지 않다. 칭기즈칸의 태생과 활동, 죽음의 사연이 담긴 무대는 바이칼호 일대이고, 몽골인들의 고향은 훌룬호와 보이르호 일대이다. 몽골군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발하슈호·카스피해·흑해·볼가강 등을 건넜다. 더구나 그들은 최고의 기술자군을 거느린 다국적군대였다. 더욱이 유목민의 이동성(mobility)은 언제든 해양민의 이동성(mobility)으로 즉시 전환할 수 있다. 이 평범한 사실을 알아챈 서양인들은 디지털문명이 시작되는 21세기의 첫날 ‘타임(TIME)’지의 표지 모델로 칭기즈칸의 사진을 실은 것이다.
둘째, 강화도는 경제적인 타격을 덜 받으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의 국가 재정은 대부분 초기에 설치한 13개 조창을 활용한 시스템으로 충당됐다. 납부된 세곡들은 일부가 한강 수로망을 이용했고, 대부분은 서해연안 해로를 따라 개경까지 운반됐다. 따라서 개경의 입구인 강화도는 조세시스템을 유지하고, 물자를 공급받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강도정부의 경제적인 능력은 궁궐·내성·중성·외성 등의 방어체제는 물론이고, 팔만대장경의 제작이라는 어마어마한 국가사업을 벌인 데서도 증명된다.
셋째, 강화도는 해양능력이 강한 고려에게는 외교에 유리했다. 강화도는 다양한 항로를 이용해서 동아시아의 어떤 지역과도 방해받지 않고 교류할 수 있었다. 특히 몽골의 적대국인 남송과 무역, 우호관계 등을 추진해서 몽골에게 외교적인 부담을 주고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데 유리했다. 실제로 송나라의 상인들이 두 나라 사이를 오고가면서 정치적인 역할과 내정정탐을 했고, 그 사실을 안 몽골은 항의와 압박을 가했다.
넷째, 무신정권은 몽골 제국이 추진한 정복전쟁의 구도를 파악하고, 내부 혼란을 활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몽골의 대고려전은 세계 패권 전략과 정복전쟁의 일부였으므로 공격 시기와 규모 등의 판단과 계획은 처한 상황과 전체 계획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그래서 40여 년 동안이나 약체의 고려를 전면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무신정권은 이러한 몽골 제국의 정책과 군사전략의 특성을 간파하고, 현실적인 한계를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이러한 추론은 몽골의 정복과정과 국제관계 상황을 보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1206년에 등장한 칭기즈칸은 1207년에 서하를 공격한 후에 강국인 금나라를 1211년부터 공격했고, 1215년에는 수도인 연경(북경)을 함락하고, 이어 고려를 침입했다. 몽골은 1219년에는 중앙아시아 서쪽의 호라즘 왕국을 점령했고, 1221년에는 헝가리와 폴란드를 침공했다. 1227년에 칭기즈칸이 전사하자, 뒤를 이은 오고타이 대칸은 1229년에 금나라를 공격했다. 1231년(고종 18) 8월에는 사리타이(撒禮塔)가 고려를 침공했다가, 강화로 천도한 해에 용인전투에서 전사했다. 몽골은 1233년에 만주를 장악했고, 1234년 1월에는 금을 멸망시켰다. 이후 1235년부터 남송을 공략했다. 또 1236년에 유럽원정을 재개해 발트해까지 진격했고, 폴란드 왕국을 공격했다. 1237년부터는 러시아의 공국들을 공격해 1240년부터는 러시아 전토를 지배했다. 1241년 4월에는 헝가리군을 완파하고, 유럽 점령의 마지막 순간에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회군했다. 그러나 1252년에는 아랍의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이란 이라크 지역을 점령했다.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다음 해에 ‘일한국(Il Khanate)’을 세웠다.
유라시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이 거대한 대전투들은 모두 강도정부 시절에 발생했다. 거대한 전쟁 속에서 강력한 적들과 교전하는 몽골에 고려는 금나라와 송나라의 배후세력이라는 지정학적 가치가 있을 뿐, 군사전략상으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그러므로 몽골군대가 고려와 벌인 9번의 전투는 정부 없는 나라를 약탈하는 수준이지, 본격적인 전쟁은 아니었다.
더구나 몽골은 1259년에 몽케 대칸이 남송을 원정하는 도중에 죽자, 대칸 계승 전이라는 내분과 혼란에 빠졌다. 결국 동생인 쿠빌라이 칸이 뒤를 잇고, 1271년에 국호를 원으로 개칭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쿠빌라이의 편을 들어 외교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본다. 그 결과 유리한 조건으로 1270년에 개경으로 돌아가고 항복, 쿠발라이의 부마국이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정복사업이 큰 틀 속에서 완료, 국내 상황이 안정되자 송나라 점령에 주력했다.
강도 정부에 대한 또 다른 평가
무신정권이 몽골의 전략, 전술적인 약점을 간파하고, 강화도가 가진 다양한 이점을 고려해 장기간 항전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정권 차원이 아닌 민족 백성의 관점에서 또 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그들은 정말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 항전할 목적으로 강도로 천도한 것일까? 정부에서 버림받고 맨 무장 상태인 백성들이 9차에 걸쳐 공격받으면서 처절하게 유린당했을 때 강도정부는 보호 조치와 공동작전 등을 실시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충주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해 승리를 거둔 관노들을 죄인으로 몰기도 했었다. 군대를 양성하고, 함선을 건조하면서 해전 능력을 강화하는 전쟁준비를 게을리했고, 주변의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 생존을 모색하는 작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내버린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받아 궁궐을 세우고, 방어체제를 구축해 수성전에 전념했다. 백성들을 강화도로 소환해 저택과 별장, 거대한 사원을 세웠으며, 팔만대장경을 제작했다. 심지어는 불필요한 행사들을 하며 사치 생활을 누렸다. 그렇다면 강화천도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항전의 성격도 있지만, 무신정권과 귀족, 불교 세력을 위한 도피라는 비중이 더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고려는 원나라의 반 지배상태로 들어가 자주를 상실했다. 친원파의 준동으로 영토가 분할됐고, 내분이 발생했다. 결국은 삼별초 진압과 일본공격에 동원돼 엄청난 국력과 인적, 물적인 손실을 입었다.
칭기즈칸과 몽골에 대한 또 다른 생각
칭기즈칸은 역사적으로 위대하고 몽골제국은 인류문화 발전에 공을 세운 나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전쟁 수행방식, 반인륜적 행위 등이란 측면에서 비판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의 생존과 생활에 막대한 피해를 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몽골의 선조인 선비족이 부여와 매우 가깝고 원(고)조선의 방계종족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를 정도 이상으로 숭배하고, 마치 몽골이 형제국처럼 대한 것으로 착각하는 우를 계속 범한다면, 식민지 백성들의 자기기만과 환상이라는 잔재를 탈각하지 못할 것이다. 고려, 군사력을 갖추고, 국제질서의 상황을 간파해가면서 유연성과 배짱을 겸한 무신정권의 외교전략은 현실감이 부족한 지금의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