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반 직장인들은 찌라시 홍수에 빠져 있다. 대외 활동이 적은 주부나 대학생에게도 찌라시는 공유된다. ‘찌라시 공화국’이다.
대구 등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지난 2~3월에는 특정 정치인과 연예인 등을 거론한 신천지 신도 명단이 찌라시를 통해 퍼졌다. “OOO가 이태원 클럽을 방문했다더라”는 찌라시 때문에 해명에 나서는 유명인도 적지 않았다.
지난 9일에는 찌라시 홍수가 절정에 달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실종됐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부터 10여 분 간격으로 ‘시신 발견’ ‘병원 이송 중’ 등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글이 난무했다. 경찰 관계자도 “확인되지 않은 찌라시가 삽시간에 광범위하게 퍼져 혼란스러웠다”고 말했을 정도다.
2010년대 초까지 증권가, 광고업계, 정계, 언론계 등에서 주로 공유되던 찌라시 시장은 급격히 팽창했다. 생산-유통-소비에 가담하는 주체들이 많아졌고 속도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카카오톡 등 모바일 메신저가 대중화되면서 1 대 1, 혹은 단체 대화방을 통해 쉽고 빠르게 생성·유포된다. 이 같은 찌라시는 다시 유튜브 영상으로 2~3차 가공·배포된다.
‘찌라시를 갖고 있다’는 게 정보 우위를 점하는 일종의 권력처럼 여겨지면서 이런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정확한 사실(정보)이 규명되기 어려운 사안일수록 잘못된 정보가 과잉 유통되기 쉽다”고 말했다.
확진자 신상·테마주 정보…이젠 '선수' 아닌 일반인도 찌라시 생산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실종된 9일엔 ‘시신 발견’ ‘성추행 보도 예정’ ‘그린벨트 관련 부동산 대책 고심’ 등 당시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순식간에 퍼졌다. 이날 오후 6시께 찌라시가 최초 유포되고 2시간도 채 안 돼 관련 유튜브 찌라시가 제작됐다.증권가 직원, 국회의원 보좌관, 대기업 정보담당자 등 몇몇 수요자를 중심으로 공유되던 찌라시가 빠르게 대중화하고 있다. 유홍식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찌라시가 일상화되고 있다”며 “소통의 질이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50년 새 더 악질적으로…
국내에 찌라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50여 년 전이다. 찌라시는 일본어로 ‘뿌리기’라는 의미다. 1970년대 대기업 고위 간부가 정부 관료 등을 만나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한 게 시초로 통한다. 당시엔 단순 소식지 형태로 극히 일부만이 공유했다.찌라시는 2000년대 들어 증권가, 광고업계 등에서 주로 생성돼 미쓰리 등 비즈니스 메신저, 이메일을 통해 유통됐다.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사회, 경제, 연예계 소식 등이 대부분이었다. 찌라시 전문 제작업체가 1주일간 돌아다니는 정보를 긁어 모아 PDF 형태의 유료 찌라시를 공급하기도 했다.
찌라시 홍수 현상은 카카오톡 등 모바일 메신저가 활성화하면서 나타났다. 다수에게 동일한 내용을 한 번에 전송할 수 있게 돼 대량으로 유통됐다. 찌라시는 대부분 ‘받은글’로 시작해 짧게는 한 줄로도 퍼진다.
내용은 더 자극적으로 바뀌었다. 대기업 내 사원 간 불륜 등 일반인의 사회생활마저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시선을 끌기 위해 더 선정적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이달 초 SK바이오팜이 유가증권시장 상장 뒤 주가가 급등했을 때는 ‘SK바이오팜 직원들의 재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사내연애가 급증하고 있다’는 찌라시가 생겨났다. 지난 5월엔 코로나19 확정 판정을 받은 서울 목동 고등학교 학생의 가족이 다니는 학원 명단이 찌라시로 나돌았다.
이런 찌라시는 ‘가짜뉴스’로도 재생산돼 빠르게 확산된다. 경찰 관계자는 “시간 차는 있지만 주부나 학생에게도 하루이틀 내 공유되는 것으로 안다”며 “갈수록 찌라시가 생성되고 유통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보 많아야 부자’란 만족감도
찌라시가 확산하는 데엔 ‘정보 욕구’와 ‘호기심’ 영향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호기심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정보도 일단 모으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며 “찌라시나 소문을 확보함으로써 만족감을 얻는 심리가 대다수”라고 설명했다. 최근 정치·사회적 불안이 높아지면서 찌라시에 대한 욕구와 의존도가 더욱 커졌다고도 했다. 곽 교수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수집한 정보 중 상당수가 잘못된 정보인 경우가 많아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했다.‘찌라시를 봤느냐’가 정보 우위를 가르는 기준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1990년대만 해도 찌라시는 정보 습득 지위가 높은 이들에게만 유통됐다”며 “찌라시를 공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일종의 욕구 같은 게 존재했다”고 말했다.
찌라시를 만드는 주체도 최근 바뀌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과거엔 증권가, 광고업계, 정치권 등에서 물질적이거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득을 얻으려는 의도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은 일반 직장인, 대학생 사이에서도 제작돼 유포된다.
처벌받는데도…여전한 찌라시 홍수
조민근 안심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받은글 형태로 도는 한 줄짜리 찌라시는 물론이고 잘못된 정보를 게시한 인터넷 사이트 링크를 공유하는 것도 처벌받을 수 있다”며 “찌라시 유포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일각에선 찌라시 생성 및 유포와 관련된 처벌이 실제 파장에 비해 적은 게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사이버 명예훼손에 대한 고소는 한꺼번에 할 수 있지만 손해배상은 개개인에게 일일이 책임을 물어야 하는 구조다. 많아야 200만원, 보통은 자동차 접촉사고 보상 수준인 수십만원 정도를 받고 마무리된다. 시간과 비용 문제로 찌라시 관련 고소에 나서지 않는 피해자가 더 많다는 전언이다.
2019년 초 찌라시 주인공이 됐다가 곤욕을 치른 직장인 A씨는 “단순 호기심이나 관심을 끌 목적으로 찌라시를 유포했을 때 그 책임이 크다는 점이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지은/김남영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