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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쓰지 못한 시인 백석의 '비워진 시간'을 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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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이후 시인 기행은 원치 않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시를 쓸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당은 사상적으로 무장한 시를 쓰라고 요구했다. 기행이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하던 언어로 이뤄진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희망과 꿈 없이 살아가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만 하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시를 붙들려 한다.

작가 김연수(50)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문학동네)은 6·25전쟁 이후 급격하게 변한 세상 앞에 선 시인 기행의 삶을 그려낸다. 기행은 1930~1940년대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다 전쟁 후 북한에서 당의 이념에 맞는 시를 쓰라는 요구를 받으며 작가로서 고뇌한다. 억지로 러시아 문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 일을 하게 되는 시인의 모습은 한 실존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시인 백석(1912~1996)이다.

김 작가는 그동안 발표한 작품들을 통해 에너지와 불안으로 가득 찬 청춘의 눈빛을 가장 가까이에서 기록하고 사랑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다. 이번 신작은 그가 작품 세계에서 핵심 키워드로 삼아온 청춘과 사랑, 역사, 개인을 모두 아우른 작품이다. 그는 ‘작가의 말’을 통해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소설이 된다”며 “이번 작품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시를 향한 마음은 간절했지만 개인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현실의 무게에 좌절했던 시인 백석의 모습을 김 작가는 기행의 삶으로 펼쳐보인다. 기행이 “폐허에 굴러다니는 벽돌 조각들처럼 단어들은 점점 부서지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대목은 속수무책의 현실 앞에서 작가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버릴 수 없지만 끝내 이루지 못할 꿈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단지 원치 않은 모습으로 한 시대를 살다 간 백석의 삶을 복원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백석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전쟁 전이 아니라 꿈꾸던 것들이 좌절된 ‘공백의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시인으로도 기억되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고, 그가 꿈꾸던 시골 학교 선생이 되지도 못한 기행은 어찌 보면 실패자처럼 보인다. 그런 삶에 소설은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다. 꿈꿨지만 이루지 못한 것들, 간절히 원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것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시대와 개인을 뛰어넘어, 지금이 아니라 먼 미래의 어느 다른 공간에서 언젠가 이뤄진다는 것을 소설은 깨닫게 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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