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아젠다 정치를 해도 전제가 틀리면 금방 들통나게 돼 있다. 전 국민에게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일정 금액을 나눠주는 기본소득 논란이 그렇다. 재원 논쟁까지 갈 필요도 없다. 왜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하는지 검증도 없이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부터 문제다.
최근 기본소득에 불을 붙인 것은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다. 비대위 회의에서 “4차 산업혁명을 위한 여건 조성과 아울러 이로 인해 파생되는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기가 아닌가 한다”고 언급하면서다. 김 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인공지능(AI)으로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생산방법으로 들어갈 때를 대비해 (기본소득을)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고 보충 설명을 했다. ‘4차 산업혁명을 하니 기본소득을 검토할 단계’라는 논리가 통하려면 한국에서 4차 산업혁명이 제대로 진행될 것이란 전제가 성립돼야 한다.
지금의 한국 정치를 보면 기본소득을 조건으로 4차 산업혁명에 저항하는 기득권을 설득해 규제완화를 관철해 낸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여·야가 담합해 ‘타다 서비스’를 금지한 데서 보듯이 기득권이 저항하면 바로 규제를 동원하기 일쑤다.
김 위원장이 제안한 ‘데이터청’ 신설만 해도 그렇다. 데이터청이 없어 데이터 접근이 어렵고 비즈니스 모델이 안 나오는 게 아니다.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신용정보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시행령이 나왔지만 사방이 함정이다. 데이터 처리자가 형사처벌을 받지 않으려면 여전히 법과 제도의 불확실성과 싸워야 한다.
4차 산업혁명과 반대로 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획일적인 근로시간제 등 노동 관련 법·제도는 말할 것도 없다. 정치가 4차 산업혁명의 여건을 조성하지 않으면서, 고용 쇼크가 예상된다며 기본소득을 검토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AI 등 기술발전으로 일자리가 줄 것이란 전제도 동의하기 어렵다. AI로 사라지는 일자리도 있지만 AI가 필요로 하거나 AI로 높아진 생산성 효과로 생겨나는 일자리도 있다. 새 일자리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일자리 상실 때문에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정치는 미래지향적일 수 없다. 기술변화와 기본소득의 관계를 실업을 매개로 직결시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교육이 기술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일자리를 잃는다면 기본소득이 아니라 교육 혁신으로 해결하는 게 올바른 처방이다.
교육이 미래를 따라가는 게 시급한 마당에 김 위원장이 정태적인 교육 불평등을 들고나온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사교육이 커져 공교육이 무력화되고 있다는 인과관계의 도치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툭하면 대입 제도를 바꿔 공교육을 황폐화시킨 건 바로 정치였다. 정부가 공적 규제를 해서라도 사교육을 줄여야 한다니 지금이 전두환 정권 시대인가. 대학이 AI 교수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는데 등록금 동결 조치는 누가 했나. 미국 대학의 온라인 강의가 부러우면 국회에 교육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고등교육 과정을 심의하자고 할 게 아니라, 대학에 자유를 주면 될 일이다.
“어떤 정책에 대한 판단은 결과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했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정치 세계에서는 외면당하고 있다. 정치인은 정의로운 정책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신통력이라도 가졌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아젠다 정치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제1야당의 아젠다 정치는 무엇이 다른지 의심스럽다.
보수란 말을 쓰든 안 쓰든 그들의 자유다. 여당이 내세우는 아젠다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야당이 오히려 여당에 판을 깔아주고 있다. 통합당이 정말 위기를 느낀다면 아젠다에 매달릴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어떻게 하면 빨리 망할지 역설적인 내부 토론을 통해 살길을 찾는 것은 어떤가. 제1야당이 선생님 1명에 학생 103명처럼 가면 ‘창조적 파괴’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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