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가 출범과 함께 ‘기본소득 도입’ 논의로 불붙고 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3일 ‘물질적 자유’를 내세우며 기본소득 정책 추진을 공식화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여야 간 공통 의제”라며 관련 법 제정 등 정책 경쟁에 뛰어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국민 의견 수렴과 재원 마련 논의도 없이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속도전’이 펼쳐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김 위원장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통합당 초선 모임에 참석해 “실질적·물질적 자유를 당이 어떻게 구현해내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인 자유는 말로만 하는 형식적 자유”라며 “배고픈 사람이 돈이 없어 빵을 먹을 수가 없다면 무슨 자유가 있겠냐”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실질적 자유’는 1986년 벨기에에서 창립된 비정부기구(NGO)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가 주창한 개념으로, 기본소득의 이론적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여야 간 기본소득 논의를 본격화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두관 의원은 이날 SNS에 “김 위원장의 기본소득 입장이 통합당 당론이 된다면 우리 정치는 정책 경쟁 시대를 열게 될 것”이라며 “이제 본격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 일부 의원은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소병훈 의원은 기본소득위원회 설립 등을 담은 기본소득법안을 이르면 이달 발의할 계획이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본소득 도입을 국민투표에 부쳤던 스위스처럼 의견 수렴 과정이 있어야 한다”며 “연간 수백조원의 재정이 소요될 수 있는 정책인 만큼 기존 복지 구조조정 등 재원 마련 방안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
의견 수렴·재원 마련은 뒷전…'기본소득' 일단 주고 보자는 정치권
한국 기본소득 '돈 뿌리기' 초점…개념·도입취지 달라“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면서 논의는 소수 정치인을 중심으로 중구난방으로 이뤄지고 있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한국의 기본소득 논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핀란드와 스위스,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에서 시도된 것과 전혀 다른 방식의 제도를 신중한 논의 없이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근로의욕 고취가 목표였던 핀란드, 기존 복지제도 개편이 중심인 스위스 등과 달리 한국의 기본소득은 “월 얼마를 주겠다”는 ‘돈 뿌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른 나라들이 전문가를 중심으로 논의해 제한된 집단을 중심으로 실험이 이뤄지고, 철저한 평가를 거쳤던 것과도 대비된다.
목표부터 달랐던 핀란드한국의 기본소득 도입 논의는 특정 연령대나 특정 직업 종사자의 사정이 어렵다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확대됐다. 2015년 경기 성남시의 청년배당, 2019년 전남 해남군의 농민수당 도입 등이 대표적인 예다. 실제 경제적 효과 등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 없이 해당 지방자치단체장의 정치적 의지에 따라 도입됐다. 다른 지자체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며 확대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한 지원금 지급도 지난 3월 전북 전주시를 시작으로 다른 지자체로 퍼지더니 5월 정부 차원의 지급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외국의 기본소득 도입 과정에는 구체적인 정책 목표가 제시됐다. 핀란드의 2017년 기본소득 실험은 전체 사회복지 지출 비용은 줄이고 근로의욕을 높이기 위해 계획됐다. 실업수당이 지나치게 많아 일자리를 구하기보다 실업수당에 안주한다는 문제 제기에 따른 것이다. 실업자에게 매달 560유로(약 76만원)의 기본소득을 구직활동을 하지 않거나 직업을 새로 구하더라도 계속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2016년 기본소득을 국민투표에 부쳤던 스위스도 마찬가지다. 모든 성인에게 매달 2500스위스프랑(약 317만원)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기존 복지제도를 대폭 줄여 재원을 조달한다는 전제가 달렸다. 기존 복지제도 혜택의 상실을 우려한 서민층을 중심으로 국민 77%가 반대표를 던졌던 이유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기존 복지제도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고 ‘얼마를 주겠다’는 말부터 하는 국내 일각의 기본소득 도입 주장은 정치적으로 수상한 목표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 중심 논의도 우려돼”논의 과정도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일부 정치인이 아젠다를 주도하며 정부와 다른 전문가그룹이 끌려가는 모양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기본소득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재명 경기지사는 경기도 자체 사업으로 ‘기본소득 박람회’를 여는 등 관련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심상정 의원을 중심으로 한 정의당과 시민단체들도 기본소득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까지 호응하고 나서며 정치권의 기본소득 논의가 불붙고 있다. 이 지사는 “K방역도 성공했는데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한 K경제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논리’로 재원 등 현실적 문제를 덮고 있다.
하지만 핀란드와 네덜란드, 캐나다 등의 기본소득 실험은 △전문가 논의 △구체적인 계획안 제시 △한정된 지역 및 인구를 대상으로 한 실험 △냉정한 평가 등을 거치고 있다. 핀란드는 기본소득 지급 2년 전인 2015년 5월부터 구체적인 도입 방안을 놓고 논의가 시작됐다. 무작위로 선정한 만 25~28세 실업자 2000명에게 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안은 이를 통해 도출됐다.
2년간의 실험을 거치며 핀란드 정부는 이들의 노동시장 참여도, 행복도 증가 등 여러 지표를 기본소득이 지급되지 않은 다른 대조군과 냉정하게 비교했다. 지난달 6일 기본소득 실험 최종 결과를 발표하며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은 수급자의 취업일수를 늘리는 데 거의 효과가 없었다”며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큰 비용에 비해 충분한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다.
최한수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기본소득은 막대한 부담이 오래 간다는 점을 감안해 특정 지역에 시범 실시하는 등 냉정한 설계와 효과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도원/성상훈/노경목 기자/런던=강경민 특파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