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 구별은 얼핏 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매우 복잡하고 애매하기도 하다. 좌파 우파에 대한 구별까지 오버랩되면 더욱 헷갈리게 된다. 그래서 요즘 한국사회만을 놓고 볼 때, 보수와 진보 구분을 정치철학적 배경을 기준으로 할 게 아니라 북한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이른바 보수 좌파, 내지는 수구 좌파라는 표현도 가능해진다. '수구'라는 말이 늘 보수에게만 붙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이같은 혼란은 서구에서 들어온 개념이 한국에서 변형을 일으킨 결과일 수도 있다. 어쨌든 보수와 진보라는 우리말의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보면 보수(保守)는 말그대로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고 진보(進步)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정치철학이나 북한에 대한 태도 등을 다 떠나 그냥 현상태를 유지하려는 태도는 보수이고 미래를 향해 지금과 다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진보라고 보면 간단하다. 일반인의 상식에도 이런 정의가 더 다가올 것이다.
진보는 더불어민주당, 보수는 미래통합당?보수와 진보라는 표현의 모호함과 다의성(多義性)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 현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진보로, 제1 야당인 미래통합당는 보수로 불린다.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관행적으로 대다수 언론들이 이런 표현을 쓴다. 지난달 치러진 4.15 총선 결과 분석 등에서도 많은 언론들이 '더불이민주당= 진보, 미래통합당=보수' 라는 전제로 기사를 다뤘다. '보수의 몰락' '범진보 180석' 등의 당시 기사 제목만 봐도 그렇다.
집권 직후부터 시작된 진보 정부의 역(逆)진보적 행태문재인 정부가 집권 직후 착수한 것은 이른바 '적폐 청산'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19대 대선 공약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게 적폐청산이었고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100대 국정과제 중 1순위도 적폐청산이었다. 과거 보수 정권에서 행해진 것은 거의 모두 '적폐'라는 전제 하에 모진 청산 작업이 시작됐다.
정부 부처마다 과거사 위원회를 두고 적폐를 솎아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적잖은 공무원과 관련자들이 개인적인 고초를 겪었고 처벌을 받기도 했다. 억울한 이들도 적지 않았음은 잘 알려진 대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작업의 공과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것이고 여기서 이를 논할 생각은 없다.
유감인 것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진보라는 이름이 따라다니는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자 마자 최우선으로 착수한 일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뒤로 돌아서 과거를 캐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한동안 뜸하더니 다시 기승을 부리는 과거사 캐기집권 초기 열을 올리던 적폐 청산은 집권 2년차로 넘어가면서 다소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지우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된데다 사법부를 포함한 국정 주요 영역에 '측근 인사 심기'가 거의 완료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침 경제가 본격적 침체의 길로 접어 들면서 고용 악화 등에 따른 경기 논란이 이슈가 되기도 했고 이후 이른바 '조국 사태'로 수세에 몰린 여권은 적폐 청산을 내세울 명분도 찾기 힘들었다.
그랬던 과거사 캐기가 요즘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총선 대승으로 국회 의석 절대 다수를 차지한 뒤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고 항간에서 제기되는 '사전투표 의혹설' 등의 역풍을 잠재우기 위해 강수를 두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2의 조국 사태'로 불리는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를 둘러싼 온갖 의혹을 덮기 위한 것일까.
한명숙 사건부터 KAL기 폭파 사건까지…한명숙 전 총리는 2007년 열린우리당 대선후보 경선 비용 명목으로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9억원을 받은 혐의로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돼 복역했고 2017년 8월 만기출소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이 사건이 "검찰의 강압수사, 사법농단의 결과"라며 재판거래 의혹을 밝혀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내비치고 있다. 한 전 총리는 결백한데 보수 정권의 사법농단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민주당은 최근 언론에 공개된 한만호 씨의 비망록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허위진술을 했다는 한 씨의 비망록은 이미 한 전 총리 재판에 제시돼 법적 판단을 받은 것이며 유죄 증거가 명확한 사건이었다는 법조계 의견이 적지 않다.
33년전인 1987년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 테러에 의해 폭파된 'KAL기 테러 사건'에 대한 재조사 요구도 나온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사건 조사가 대단히 미진했다는 게 밝혀져 있지 않느냐"며 조사가 새로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안다만 해에서 당시 폭파된 KAL858기 동체로 추정되는 물체가 발견돼 우리 정부가 미얀마 정부와 조사를 협의 중인 가운데 나온 발언이다.
이 사건은 발생 한 달만에 김현희 등 북한 공작원들이 붙잡혀 북한이 벌인 폭탄테러라는 결론이 나왔고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에서 모두 북한의 테러로 확인됐다. 일각에서는 1987년 대선 직전 벌어졌다는 이유를 들어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해 왔는데 이번에 동체 추정 물체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재조사를 벌이자는 것이다.
세월호도 5·18도 현재 진행형 세월호 참사 역시 검찰과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전면 재조사를 진행중이고 5·18 광주민주화항쟁 진상조사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5·18 40주년 기념식에서 "발포 명령자 규명과 계엄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헬기 사격의 진실과 은폐 조작 의혹과 같은 국가 폭력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들"이라고 말했다.
물론 아무리 오래 전 사건이라도 재조사의 명분과 필요성이 있다면 끝까지 진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많은 과거사 재조사가 모두 순수한 진실 규명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내 편' '네 편'을 가려 '내 편'에 유리할 경우 이미 지난 사건도 캐고 또 캐면서 계속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네 편'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단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돌아 볼 일이다.
일각에서는 이런 식으로 계속 먼 과거까지 돌아갈 거면 6.25도 남침인지 북침인지 재조사하고 한일 합방까지 재조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우스갯 소리처럼 나올 정도다. 실제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는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친일파를 현충원에서 파묘(무덤을 파냄)해야 한다"며 관련법을 만들겠다고 했다.
금감원까지 과거사에 매달려과거사 재조사는 비단 정치적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금융감독원은 윤석헌 원장 취임후 '키코(KIKO·통화옵션상품) 사건'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시작했다. 2013년 대법원 판결로 은행들의 피해 보상이 끝난 사안이었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금융 적폐'로 지목되자 다시 들춰낸 것이다.
금감원은 지난해 12월 신한 우리 산업 하나 대구 씨티은행에 키코로 손실은 입은 업체에 15~41%를 배상하라고 권고했지만 우리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은행은 '버티기'에 들어갔다. 산업은행 씨티은행은 배상안을 거부했고 나머지 은행은 지금까지 이렇다할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은행들은 이미 종결된 사건에 다시 배상할 경우 배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다 금감원의 재조사 조치가 부당하다고 보고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형식적으로는 강제력이 없는 '권고'라지만 금융회사들이 금융감독원의 조치에 반기를 드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만큼 키코 재조사가 합당치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과거로 과거로…임진왜란, 단군신화도 재조사 하나여권이 하도 오래 지난 일까지 다시 파헤치고 나서니 이런 식이면 임진왜란까지 재조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야권에서 나올 정도다. 설훈 최고위원의 KAL기 폭파사건 재조사 발언이 나온 뒤 인터넷에는 "이럴 거면 단군 신화도 재조사해야 한다. 정말 곰이 마늘과 쑥을 계속 먹었는지, 여자가 된 게 호랑이가 아닌 곰이 과연 맞는지, 혹시 조작된 건 아닌지 등도 모조리 재조사해야 한다" 댓글이 등장할 정도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일이다. 진보라 불리는 정치집단의 행태는 앞으로 나가기는 커녕 자꾸 자꾸 뒤로만 가고 있다.
코로나는 물론 4차 산업혁명, 경기침체,미국과 중국의 강대강 대결로 인한 세계 무역질서와 국제정치 질서의 근본적 변화 등등 지금 미래를 바라보고 예측하고 대응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다. 그런 미래를 향해 대비하고 나아가야 할 '진보' 정권은 그런데 자꾸 과거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런 여권을 과연 진보 정권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로 향하는 퇴보 정권으로 불러야 하나?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