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럽을 제패했다. 10여 년의 통치 기간에 ‘자유, 평등, 박애’에 기초한 제도개혁으로 근대를 개막했다. 포병장교 출신으로 전술과 보급, 상훈 등 대대적인 혁신을 통해 오합지졸인 프랑스군을 당대 최강으로 변모시켰다. 전투식량으로 개발된 오늘날의 일용품인 통조림이 유명한 사례다. 또 야전병원에서 부상자를 분류하는 혁신적 시스템인 트리아지(triage)는 현재 전 세계 병원에서 통용되고 있다.
전방부대 군의관이었던 도미니크 라레(1766~1842)는 전투가 벌어지면 아수라장이 되는 야전병원의 효율적 운영 시스템을 창안했다. 부상자를 ‘①회생이 어려운 치명상자, ②즉시 치료하면 회생하는 부상자, ③생명에 지장 없는 경상자’의 세 가지로 구분했다. 치료 우선순위는 회생성·시급성을 기준으로 ‘부상자-경상자-치명상자’의 순서였다. 외견상 간단한 이 분류 방식은 치료 능력을 배가시켜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이전에는 가망 없는 치명상자를 돌보느라 회생 가능한 부상자가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계급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부상 정도에 따라 분류하는 체계는 평민 출신이 주축이었던 시민군의 사기도 높였다.
야전병원에서 출발한 트리아지를 반추한 계기는 최근 중국 우한에서 발원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의 의료시스템이 순식간에 과부하로 붕괴 위기에 몰렸었기 때문이다. 야전병원을 비롯한 의료시스템은 투입과 산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관건이다. 과도한 투입은 자원의 낭비로 이어지고 변동성에 따른 일시적 수급 불일치의 위험성도 상존한다. 따라서 평상시 수요를 기준으로 하되 특수상황을 염두에 두고 공급능력을 설정하지만 모든 돌발사태까지 대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폴레옹 군대가 야전병원의 혼란상을 트리아지라는 새로운 발상으로 수습했듯이 코로나19로 야기된 과부하의 돌파구로는 디지털 기술이 부각됐다. 미국 워싱턴주 프로비던스병원의 담당책임자는 “코로나19 감염자 중 상당수는 원격의료를 통해 집에서 진료받으면 되기 때문에 병원에선 중증 환자를 더 집중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트리아지 개념을 적용하면 중증환자를 오프라인에서 치료하고, 경증환자는 온라인으로 처방하는 환자 분류법으로 시스템 전체의 의료서비스 공급 역량을 높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시적으로 원격의료가 허용돼 실질적 효과를 체험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흐름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답보상태였던 원격의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감염예방을 명분으로 원격의료를 단편적으로 확대하는 편협한 시야에서 벗어나서 사회경제적으로 가속화되는 디지털 격변을 흡수하는 개방적 관점이 필요하다. 핵심은 공공독점 방식인 의료보험체계의 단점을 보완해 혁신의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방향이다.
현재는 사실상 의료서비스 전반에 대한 엄격한 가격통제를 시행하는 폐쇄된 동물원에 비유된다. 기존 구조를 유지하면서 원격진료만 확대하면 감염대응 능력은 높일지라도 미래 산업의 관점에서는 찻잔 속 태풍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한다. 원격의료 확대는 의료분야의 선도적 혁신에 기인한 차별적 역량에 대해 보상하는 규제완화와 병행돼야 한다. ‘영리병원’이라는 명칭으로 매도되는 ‘투자개방형 의료법인’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우리나라 의료서비스 분야가 국내를 넘어 글로벌 일류로 발전하려면 현행 의료법인 구조만으로는 백년하청이다.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우리나라 민간 의료인들의 열정과 헌신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 이들의 노력으로 일반 국민이 저렴한 비용으로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 구조가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도 분명하다. 원격의료는 의료시스템 전반을 아날로그 시대의 닫힌 동물원 구조에서 미래 디지털 시대의 열린 생태계로 전환하는 전체적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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