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게 웃는 눈빛이었다. '부부의 세계'에서 발자국 소리까지 무섭던 박인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본인도 "나만 보면 무섭다는 반응이 가장 신기했다"는 배우 이학주는 작품의 인기로 쏟아지는 관심에 그저 "감사하다"고 말했다.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믿었던 여성이 남편의 배신 이후 소용돌이에 빠진 이야기를 담았다. 빠른 전개와 현실 부부 관계를 반영한 몰입도 높은 캐릭터들로 매회 신드롬적인 인기를 얻었다. 지난 16일 종영 당시 28.4%(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를 기록하며 비지상파 플랫폼 중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학주가 연기한 박인규는 명목상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지만 인터넷 도박에 빠지면서 동거녀 민현서(심은우)를 괴롭히는 인물. 민현서에 대한 집착을 애정으로 착각하는 비뚫어진 캐릭터다.
이학주는 거칠고 광기 넘치는 박인규를 실감나게 연기하며 안방극장에 눈도장을 찍었다. 극이 마무리 되기 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퇴장하면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극의 중요한 부분이라 박인규를 누가 죽였는지 말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부부의 세계'에 애정을 보인 이학주는 기라성 같은 선배 배우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존재감으로 더욱 주목받았다. 그런 평가에 "쑥스럽다"는 반응을 보인 이학주는 "김희애 선배님과 함께 촬영하는 전 날에는 부담이 돼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면서 남모를 부담감도 털어 놓았다.
▲ '부부의 세계'가 마지막 방송을 마쳤다. 참여한 배우로서 어떻게 봤나. 너무 많이 사랑 받고 관심받았다. 개인적으로도 뜻깊고 영광이었던 날들이었다. 감사했던 시간이었다.
▲ 작품은 사랑받았지면 연기한 캐릭터, 박인규는 욕을 많이 먹지 않았나. 어제(17일) MBC '복면가왕'에 심은우 배우가 나왔는데, 거기에도 '저런 현서를 괴롭히냐, 박인규 나쁜놈'이라는 댓글이 달리더라. 제가 욕을 먹는 것도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감사했다. 관심이 없는 것 보다는 가져주시는게 좋으니까.
실제 성격과 박인규와는 전혀 다르다. 주변에서 보기 힘든 친구니까, 역할을 연기할 때 상상을 많이 하면서 일반인의 기준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제 머리속으로 할 수 있다고 바꾸는 작업이 어려웠다. 그런 건 힘들었다.
▲ 그럼에도 연기에 대한 호평도 이어졌다. 전 아직도 제 연기를 보면 이상하다. 제 목소리, 표정을 보는 것도 힘들다. '부부의 세계'를 보면서 저런 표정을 했나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모완일 감독님, 주현 작가님께 감사했다. 지선우(김희애) 방에서 "확 까벌려지기 싫으면"이라고 말하면서 위협하는 장면이나, 현서와 계단에서 재회하는 장면이나, 그런 장면을 방송으로 보면서 저도 보고 놀랐다.
▲ 본인과 다른 모습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던가. ''부부의 세계' 재밌는데 네가 나오면 몰입이 깨진다'는 사람도 있었고(웃음), '연기가 늘었다'는 분들도 있고. 오랜만에 연락이 온 고등학교 선생님은 '약간 의심했다'고 하시더라. 뭘 의심했을지 싶지만. 하하하.
▲ 박인규가 죽음으로 퇴장하는데, 연기한 배우로서 연민은 없었나. 박인규가 우리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은 들었다. 대본을 보고 '죽어서 아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이렇게 가는구나' 싶었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거 같았다.
▲ 극중 김희애를 폭행하는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촬영하기에 힘들진 않았나. 그건 제가 아니다.(웃음) 무술 팀에서 하신 거다. 마지막에 와인병을 맞고 쓰러진 것만 저인데. 옆에서 봤을 때 위험하거나 그렇게 찍지 않았다. 위험한 부분은 거의 대역으로 촬영을 했다.
▲ 이 장면 빼고도 임팩트 있는 장면도 많았다. 김희애 선배님과 연기할 때, 어쨋든 제가 그 폭력 장면을 끌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두려웠다. 자칫 잘못하면 박인규가 우스워질 수 있을거 같더라. 극의 흐름도 있지만 그 인물의 기운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들에 자신이 없었다. 손도 덜덜 떨리고, 잠도 잘 못자고. 촬영이 잡힌 날엔 아침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몸과 마음을 점검하고 그랬다. 촬영장에서 주도적으로 끌어가야 하는데, 아직 너무 쑥스러웠다. 그런데 김희애 선배님이 많이 얘기해 주시고,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도록 복돋아주셨다. 아침마다 두려운데 저녁엔 재밌고, 후련했다.
▲ 김희애와 연기대결에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줬다.연기대결은 절대 아니다. 이 대사와 지문을 그렇게 연기할 수 있구나. 그분을 보며 느꼈다. 그래서 더 떨렸다. 지문을 잘 이해못했을 수 있고, 불완전할 수 있으니까. 그게 무서우면서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함께 연기하면 뭔가 제가 준비한 거 보다 잘되는거 같았다. 언제 다시 할 지 모르겠지만 또 함께 하고 싶었다.
▲ 악역 연기를 하면서 염두하거나 주의한 부분이 있을까.연기를 할 때 '너, 지선우 우습다'고 마음으로 계속 말했다. 지선우가 이혼 전후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뭔가를 챙기려는 모습을 '우습다'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러지 않으면 주눅들어서 할 거 같더라. 지선우 캐릭터도 자신의 뭔가를 지키는 사람아닌가. 그 와중에 품위를 유지하려는 걸 보며 박인규 입장에선 '너와 나나 다른게 뭐냐' 하지 않을까 싶었다.
▲ 19금 '부부의 세계' 폭력성 담당이었다. 나를 왜 무서워하나 싶었다.(웃음) 그게 젤 신기했다. 날 왜 무서워 할까 싶었다. 캐릭터를 처음 받았을 땐 두려움이 있었다. 폭력적인 장면이 있든 없든 분위기를 무섭게 만들어 줘야하는데 그게 어려워서 부담감이 있었다. 촬영장에서는 그런 폭력적인 장면에 대해서 무술감독님들이 지도를 해주셨다. 그래서 그것만 하면 돼서 합을 위해서만 집중했다. 그것 외에 현서 역할 친구에게는 폭력을 행사해야 하니 미안했다. 최대한 반복해서 찍지 않게 노력했다.
▲ 등장만으로 스릴러 공포가 되는데, 심은우 배우와 호흡은 어땠나. 심은우 배우와는 친하다. 그제는 만났고, 어제도 연락했다. '복면가왕' 출연하는 거 보면서 '노래잘한다'고 연락했다. 첫 촬영부터 호흡이 좋았다. 마지막 고산역에서 헤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도 도움을 받았다. 리허설을 할 땐 감정을 못잡겠더라. '큰일났다' 싶었는데, 촬영에 들어간 후 심은우 배우가 앞에서 어떤 눈빛을 주는데 그 감정이 쏟아졌다. 참 신기한 경험을 했다. 정말 고마웠다.
▲ 박인규 성격과 전혀 다른 거 같은데 어떻게 캐스팅된 건가. 저도 모르겠다. 모완일 감독님이 '사실 잘 모르겠는데, 잘 할수도 있을 거 같다'고 하시더라. 영화 '뺑반'에서 나온 모습을 보셨다. 본인도 어려운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딱 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하더라. 처음엔 갈피를 못잡았다. 첫날 찍은게 싱크대에서 약을 발견하는 장면인데 꽤 오래 찍었다. 그걸 찍고 '이런 캐릭터구나' 감을 잡고, 두번째 촬영에서 수영장에서 달리는 걸 찍으면서 '아, 이거구나' 하고 그렇게 찍으면서 알아갔다.
▲ 오랫동안 촬영했다.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연기를 하다보니 후유증이 남을 법 한데. 제가 나오는 장면이 많진 않았다. 한 번 찍고, 한달 반 쉬고, 한 번 찍고 3주 쉬고 그랬다. 오히려 텀이 길어서 집중하는데 힘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JTBC 새 월화드라마 '야식남녀'를 찍고 있다. 무조건 빠져나와야 했다. 그래서 바로 빠져나왔다. 올해 3월부터 '부부의 세계'와 '야식남녀'를 같이 찍었다. 다 무섭다고 하시지만, 좀 덜 무서운 장면들을 같이 찍는 시기에 촬영해서 다행이었다.
▲ 악역 이미지에 대한 우려는 없나. 제가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이번엔 이걸 열시히 하고, 다음엔 다음의 것을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 '부부의 세계' 인기 비결은 뭐라고 보나?뻔하지 않아서 그런거 같다. 이야기의 힘이다. 여기에 김희애 선배님 연기도 있고, 감독님 연출도 있었던 거 같다.
▲ '부부의 세계'는 결혼과 연애에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배우로서 어땠나. 불륜이 막연하게 '나쁘다'고만 생각했는데, '부부의 세계'를 통해 불륜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거 같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그걸로 끝나지 않겠구나 싶었다.
저는 결혼을 한다면 막연히 부모님처럼 되고 싶었다. 두분은 사이가 안좋을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고 그렇다. 그런데 재밌다. 그래서 동영상도 많이 찍어 놓는다.
▲ 박인규는 민현서의 평가대로라면 만나면 안되는 '불쌍한 남자' 아닌가. 인간 이학주는 어떤지. 저는 귀찮게 하는 스타일이다. 통화도 많이 하고. 연애할 땐 한 달에 3~4000분 정도 하더라. 일상을 듣는 것도 좋아하고, 말하는 것도 좋아한다.
▲ 원래 배우를 꿈꾼 건 아니고 연출자가 되기 위해 연극영화과를 진학했다고.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가진 것에 비해 빨리 기회가 왔고, 많이 배웠다.
▲ 2012년에 데뷔해 벌써 9년차더라. 그렇게 길게 한 지 몰랐다. 제가 단체 활동을 좋아하더라. 대학교 와서 보니 연극이나 영화를 만들 때 그런 걸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거에 매료됐다. 이 일은 사람이 항상 모여야 한다. 그런 분위기가 좋아서 늘 좋은 기억만 남는다.
▲ '부부의 세계' 인기가 배우 이학주에게로도 이어진 듯 하다. 최근 인기를 실감하나?요즘은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니까 잘 못알아보시더라. 한 5명 정도? 오늘 계단 올라오면서 2명 정도 알아보신거 같고.(웃음) 저는 다 기억한다. 왜냐면 아직까진 좀 생소한 일이라. 이상하다. 저에게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의견을 내는게. 생소한 데 기분이 나쁘진 않다. 다른 작품도 잘해서 저에 대해서 궁금하셨으면 좋겠다.
▲ '부부의 세계'와 차기작 '야식남녀'가 완전 다른데. '부부의 세계'는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어서 엄청나게 집중된 상태로 찍었다. 반면 '야식남녀'는 또래들이고, 밝은 작품이라 장난도 많이 친다. 다른 재미가 있다. 그 캐릭터는 제가 처음 연기하는 지적인 캐릭터다. 그렇게 가방끈이 긴 캐릭터가 처음이라.(웃음) 옷차림도 디자이너 설정이라 새롭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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