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C현대산업개발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 작업도 중단된 상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항공업 구조조정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지적이 나온다.
HDC현산은 30일로 예정돼 있던 아시아나항공 주식 취득 일정을 ‘거래종결 선행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날부터 10일이 경과한 다음날 혹은 당사자들이 합의하는 날’로 연기한다고 29일 발표했다. 향후 주식 취득일을 명시하지 않은 채 기존 인수 일정을 지키지 않겠다는 뜻을 공식화한 것이다.
HDC현산은 “러시아 정부의 기업결합심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지만 이는 표면적인 명분일 뿐 업계에선 인수 포기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미국 중국 등 5개국에선 이미 기업결합 승인이 난 상태여서 인수 의지가 있다면 굳이 주식 취득을 미룰 이유가 없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HDC현산은 이전에는 인수 연기를 결정하면서도 인수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는 신호를 시장에 줬다”며 “하지만 이번엔 구체적인 인수 일정을 내놓지 않는 등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석했다. HDC현산이 채권단에 아시아나항공의 대출금 상환 연장, 금리 인하와 함께 인수조건 변경을 요구하는 상황도 이번 결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항공도 이스타항공 지분 취득 예정일을 29일에서 ‘미충족된 선행조건이 모두 충족될 것으로 합리적으로 고려해 당사자들이 상호 합의하는 날’로 변경한다고 지난 28일 공시했다. HDC현산과 마찬가지로 인수 종료 시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여파로 항공사들이 도산 위기에 몰리며 인수 계약 시점보다 값이 싸졌고, 항공업황 회복 여부도 불확실하다며 무리한 인수에 따른 경영상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분석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국내 항공사들이 운영하는 국제선의 90% 이상이 중단됐고, 매출이 없는 상태에서 리스료 등 고정비가 매달 수천억원씩 나가면서 항공사들은 직원들을 유급 또는 무급 휴직시킨 상태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
기류 확 바뀐 HDC현산…범현대家도 "아시아나 포기가 낫다"“남은 절차의 조속한 처리를 통해 인수를 정상적으로 마무리하고, 인수 항공사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HDC현대산업개발이 29일 아시아나항공 인수 절차의 무기한 연기 결정을 설명하면서 내놓은 공식 입장이다. 시장에선 그러나 HDC현산이 인수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커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글로벌 항공사들이 보유한 국제노선 운항이 중단된 상황이 석 달째 지속되는 데다 당분간 개선될 가능성도 낮다는 판단이다. HDC현산의 인수 연기 결정은 인수 계약 체결 후 벌써 세 번째다.
HDC현산의 고민HDC가 인수 작업을 계속 연기하는 건 코로나19로 모든 시장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HDC현산은 지난해 11월 아시아나항공의 가격으로 2조5000억원가량을 ‘베팅’했는데, 코로나19로 항공사들이 대규모 손실을 내고 있어 이 같은 가격이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 그룹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인수 당시 HDC현산을 최대한 지원키로 의견을 모았던 범(汎)현대가(옛 현대그룹 계열사 모임)에서도 최근 들어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포기하는 게 낫다는 의견이 급격히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000억원을 보태며 재무적 투자자로 인수전에 함께 나섰던 미래에셋금융그룹의 자금난 등도 인수 작업 중단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산업계는 보고 있다. 미래에셋금융그룹은 최근 주가 하락과 해외 부동산 투자 과정에서 코로나19 영향을 받으며 고전 중이다. 아시아나항공 인수와 함께 사업을 벌이려던 항공리스업 추진도 중단한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포기한 적이 있는데, 9년간 법정 소송 끝에 이행보증금 3150억원 중 절반 이상(1951억원)을 돌려받았다”며 “HDC현산이 인수를 포기해도 계약금 전부를 잃지 않는다는 얘기”라고 했다. HDC현산이 낸 이행보증금은 2500억원 안팎이다.
제주항공도 인수 포기에 무게제주항공은 이스타항공의 노조 문제까지 겹쳤다. 이스타항공은 코로나19 여파로 지난달 전 노선 운행을 중단했다. 보유 현금이 바닥난 상태에서 매출도 발생하지 않자 1600여 명의 직원은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스타항공 관계자는 “1월 월급은 40%만 나왔다”며 “2월부터 매달 임금이 전액 체불된 상태”라고 했다. 이스타항공의 한 달 인건비는 60억원 정도다. 여기에 리스료 등을 합치면 매달 100억원가량의 고정비가 계속 나가고 있다는 계산이다.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대금은 공식적으로 545억원이지만, 이스타항공이 이 중 200억원을 자본금으로 넣도록 계약이 되면서 실제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금액은 345억원 정도다. 제주항공이 이스타항공을 인수한 뒤에 추가로 부담해야 비용이 실제 인수금액과 비슷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스타항공이 전 직원의 20% 퇴직과 임금 30% 삭감을 밀어붙이면서 이스타 직원들은 ‘제주항공 인수 반대’ 등을 내세우며 반발하고 있다.
“항공 구조조정 힘들어질 수도”국내 항공사는 총 11개에 달한다. 코로나19를 계기로 국내 항공사도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두 항공사의 인수 작업은 항공업계의 자발적 구조조정이란 평가를 들었다. 이에 따라 이들 작업이 무산되면 항공업 구조조정에 찬바람이 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아시아나항공의 매각을 주도하고 항공업 지원에 나서야 할 산업은행 등의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아시아나항공처럼 덩치가 큰 항공사를 지금 상황에서 지난해 받았던 가격으로 누가 살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산은이 주도적으로 인수를 이어가도록 추가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재후/신연수/이선아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