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산하 국제 전문기구 15곳 가운데 중국인이 사무총장 등 수장을 맡은 곳은 25%를 넘는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네 곳의 수장이 중국인이다. 유엔 산하 국제기구 수장 중 미국, 영국, 프랑스 출신은 각각 1명뿐이다.
세계 국제기구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하는 등 국제기구에서 한발 물러서기 시작하자 중국이 그 틈을 타고 세력을 확장한 결과다. 국제기구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대폭 커지자 미국도 조금씩 견제에 나서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보건기구(WHO)에 대한 지원금 중단을 선언한 것도 중국에 휘둘리는 국제기구에 압박의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지난해 초 열린 FAO 사무총장 선거에서 취둥위 전 중국 농업농촌부 차관의 당선을 막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들이 중국 쪽에 서는 바람에 미국의 전략은 실패했다.
미국은 지난달 열린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사무총장 선거에선 당선이 유력하던 중국 출신 왕빈잉 사무차장을 탈락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중국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미국 다음으로 국제기구에 많은 돈을 내는 국가가 됐다. 특정 국가나 인물에 대한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2017년 총장 취임 전까지 12년 동안 에티오피아 보건부와 외교부 장관 등을 지냈다. 당시 중국은 아프리카 최빈국이었던 에티오피아에 대규모 투자를 하며 좋은 관계를 이어왔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차이나머니’의 수혜자인 거브러여수스 총장은 중국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중국 등 강대국 간 갈등으로 국제기구의 위상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최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코로나19 관련 비공개 브리핑을 개최하려고 했으나 책임론이 나올 것을 경계한 중국이 이를 무산시켰다. 온라인 회의 같은 사소한 사안을 두고도 강대국들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국제기구에서 강대국들의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개입될 경우 세계가 리더십 실종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포린폴리시는 “국제기구가 패권 전쟁터로 전락한다면 세계 각국은 앞으로 각자도생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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