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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버림받았다"…섬유산업의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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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구 비산동의 대구염색산업단지. 23일 찾은 이곳엔 조업을 중단한 채 철문을 굳게 닫은 공장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 공단에 있는 150개 업체 중 약 20곳이 가동을 멈췄다. 나머지 업체들도 1주일에 이틀이나 사흘만 가동하는 부분조업에 들어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섬유제품 수출이 막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염색공장을 운영하는 H사는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 회사에 20억원 규모의 남성복 원단을 납품했으나 현지 은행 거래가 중단되면서 무역대금을 받지 못했다. 추가로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기 위해 제작해놓은 14억원어치 원단은 주문이 취소돼 고스란히 재고로 쌓였다. 이 회사는 최근 외환위기 후 처음으로 일부 직원을 내보냈다. 이 회사 대표는 “공장을 돌린 지 50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혹독한 위기는 처음”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한두 달 안에 코로나19 사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섬유업계의 줄도산을 피할 길이 없다”고 토로했다.

섬유소재 수출 세계 7위, 기술력 세계 4위를 자랑하는 국내 섬유산업이 뿌리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국내 섬유산업 매출의 60~70%를 차지하는 수출이 전면 중단된 데다 내수시장도 얼어붙으면서다.


경기 양주의 검준섬유공단에서 날염(프린팅) 공장을 운영하는 T사의 김모 사장은 요즘 돈을 빌리러 다니는 데 하루 대부분을 쓴다. 지난 2월 약 10억원어치의 미국 수출용 제품을 납품했지만 국내 원청업체가 대금을 5~6월에 늦춰 지급하기로 해 자금난을 겪고 있어서다. 김 사장은 “직원 월급이 밀린 건 물론 5억원가량의 전기요금과 가스비를 두 달간 못 내 독촉장을 받고 있다”고 했다.

발주 물량이 뚝 끊기면서 섬유업체들은 생존을 위한 자구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부산경남섬유공단은 24일부터 발전기 가동을 중단하고 공단에 입주한 업체들에 전기를 공급하지 않기로 했다. 하흥태 부산경남섬유공단 이사장은 “생산 물량이 급감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장을 가동하면 전기료 부담으로 적자 폭만 커진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전기 공급을 일시적으로 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음주 금요일에도 전체 휴무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종사자 약 28만 명, 4만6000여 개 업체에 이르는 섬유산업이 고사 직전의 위기에 처했지만, 섬유업계 내부에선 ‘버림받았다’는 자조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22일 정부가 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7대 기간산업에 40조원을 수혈한다고 발표했지만 섬유산업은 제외됐기 때문이다. 섬유 관련 협회 관계자는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온 섬유산업의 기술력과 생태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섬유업계는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벼랑끝 내몰린 섬유산업의 탄식
부산·대구 염색·봉제공장 줄줄이 '셧다운'…"전기료 낼 돈도 없다"


통상 3~5월은 섬유업계의 성수기로 통한다. 그럼에도 섬유업계가 벼랑 끝에 내몰린 데엔 미국 등의 수출길이 막힌 게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국내 섬유산업은 해외 업체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주로 하는 세아상역, 한세실업, 한솔섬유 등 대형 봉제업체를 중심으로 원단, 편직, 염색, 날염 등 2·3차 협력업체(벤더)들이 촘촘히 얽혀 있는 구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주요 해외 발주처인 콜스, 갭, 나이키 등 대형 의류·스포츠 브랜드와 월마트 등 유통기업들이 대금 지급을 미루거나 주문을 속속 백지화하면서 연쇄 충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국내 1차 벤더들이 해외 발주처로부터 받지 못한 납품대금은 1억2000만달러(약 1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이들 OEM 업체가 발주처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면서 2차 및 3차 협력사들로 피해가 번지고 있다. 경기 안산의 3차 벤더업체인 C사 대표는 “이틀 전 2차 벤더업체로부터 당초 지난달 주기로 했던 납품 대금을 6월에야 주겠다는 공문을 받고 망연자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섬유수출 물량은 9억9000만달러로 전년 3월 대비 8.8% 감소했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 관계자는 “코로나19 충격이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수출 감소폭은 4월에 더 급격하게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1차 벤더업체들은 납품 취소로 인한 자금난 등의 이유로 자체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동시에 유동성 확보에 나서고 있다. 신성통상은 이달 초 1년 만기 80억원어치 사모 회사채를 발행했다.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 상환을 위해서다.

신발 관련 섬유원단을 제작하는 부산섬유공단에는 대다수 업체가 평소 공장가동 시간의 3분의 1 수준인 주간 8시간만 가동하고 있다. 대구염색공단의 폴리에스테르 염색 업체인 세광패션은 지난 22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공장 가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내수 시장도 절반 수준으로 반토막 나면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서울 창신동 일대 1000여 개 의류봉제 업체도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다. 주로 동대문시장에서 떼온 원단과 부자재로 생산한 의류를 전국 시장과 아울렛, 온라인 쇼핑몰 등에 공급하는 업체들이다.

30년째 창신동에서 여성복을 생산하는 수진어패럴은 지난 2~3월 매출이 전년 대비 30% 이상 줄었다고 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떠난 현지 의류제조업 수요가 국내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한 게 실수였다”며 “일감이 계속 줄어 월세 1000만원이 밀릴 정도로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셔터를 내린 채 무기한 휴업에 들어간 의류제조업체도 늘고 있다. 사업자 등록 없이 부부나 가족끼리 꾸려온 영세업체부터 쓰러지고 있다. 창신동 M중개업소 관계자는 “봉제제조·유통업은 봄이 가장 바쁜 시기인데 올해는 임대료를 20~30% 내려도 공장 공실이 쌓여가고 있다”고 전했다.

원단, 부자재, 혼수품 등 4000여 개 상점이 있는 동대문종합시장도 반세기 만에 최악의 불경기를 겪고 있다. 1970년대 조성돼 국내 섬유패션산업의 메카 역할을 했지만 코로나19로 이곳을 찾는 손님의 발길이 크게 줄었다. 원단 상점을 운영하는 한 업체의 대표는 “장사가 안돼 재고 원단 전부를 50% 할인해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인, 일본인들이 직접 와서 원단을 사 갔는데 코로나19 이후로 찾아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동대문종합시장에서 40년째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는 김모 대표는 “작년에 보증금 3000만원, 월세 300만원 하던 약 10㎡ 점포가 2000만원에 200만원으로 나와도 임차인을 맞추기 어렵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각종 중소기업 지원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불만도 나온다. 경기 양주 검준섬유공단의 S사 관계자는 “정부가 각종 지원 프로그램을 널리 홍보하고 있지만 공단에 있는 50개 업체 가운데 제대로 대출받은 업체는 단 한 곳도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배영봉 한국패션칼라산업협동조합연합회 전무는 “외환위기 때 수출로 대한민국을 살렸던 섬유산업의 전통과 명맥이 끊길 판”이라며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정선/민경진/대구=오경묵 기자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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