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리스(sportsless)’ 시대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 골프가 ‘셧다운’(일시정지)됐다. 2020 도쿄올림픽이 1년 뒤로 밀렸다. 누구에겐 꿈이고 누구에겐 밥이며, 누구에겐 삶 자체였던 일상의 실종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실의 시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부재의 후유증일까. 벨라루스의 ‘겁 없는 프로 축구’가 세계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인구 950만 명의 이 북유럽 국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창궐을 비웃듯 벌써 열흘 넘게 경기를 강행하고 있다. “보드카와 사우나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호언장담에 세계가 경악했다. 이 ‘마이웨이’가 미스터리한 스포츠 면역력의 연구 대상이 될지, 무지와 오만이 부른 참사로 파국을 맞을지는 코로나만이 알고 있다. 바이러스가 세상의 판관으로 떠올랐다.
코로나가 쥔 정치의 운명
이전까진 정치가 스포츠를 흔들었다. 국가 갈등과 전쟁으로 취소된 하계올림픽이 세 번(1916년, 1940년, 1944년)이다. 인종차별, 이념 갈등, 야만적 학살, 테러, 인권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올림픽=정치의 역사’라는 등식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죽하면 자크 로케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스포츠가 정치를 초대한 적이 없다. 정치가 불청객으로 걸어들어왔다”는 해명을 해야 했을까.
그 정치를 코로나가 집어삼킬 기세다. “올림픽을 미뤄야 한다”는 국제적 요구가 빗발칠 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완전체 올림픽”을 운운하며 벚꽃놀이를 즐기는 체했다. 물밑으로는 후원 기업들에 ‘다양한 연기 시나리오’를 흘리면서다. 일본은 안전하다는 정치적 쇼의 결말은 곧 드러났다. 올림픽 연기 발표 직후 하루 확진자 수가 기다렸다는 듯 두 배로 폭증했다. 하루 확진자가 200명을 돌파한 도쿄도는 거의 봉쇄 직전이다. 감염경로를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경우가 40%에 달한다면, 비극은 시작일 뿐이다. 집권 연장이라는 정치적 도박에 몰입하느라 신속한 대응을 미뤘다는 비난이 일본 내부에서부터 나온다. 올림픽으로 세계를 ‘치유’하겠다던 아베의 야망이 코로나 앞에 멈춰 섰다.
염치(廉恥)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건 따로 있다. “대국적 자기희생으로 코로나의 세계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았다”는 팬데믹(대유행)의 진원지 중국이다. 이 자화자찬이 나오기 무섭게 중국의 코로나 사망자 수(3305명)가 축소됐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우한에서만 이틀 동안 5000구의 유골을 실어날랐다는 운전사의 증언이 터져 나온 것이다.
부재로 말하는 존재의 가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코로나의 위험성을 평가절하하며 허세를 부리다가 위기를 키웠다. 20만 명이 사망할 수 있다는 내부 전망을 접하고서야 ‘사회적 거리두기’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미 사망자가 9·11테러(2977명) 때를 넘어선 마당이다. 코로나가 비춘 정치 리더십의 민낯, 국제 공조의 실패다.
존재의 가치는 부재로 드러난다. 한 골프 마니아는 말했다. “새벽 3시면 눈을 떠 습관처럼 TV를 켠다. 중계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는 우울감에 잠을 설친다.” 선수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 리버풀 수비수 버질 판데이크는 “관중 없는 축구는 의미가 없다”며 리그 중단을, 관중의 부재를 슬퍼했다.
스포츠는 격리됐으나 스스로를 치유한다. 선수들은 관객을, 관객은 선수들을 위무하기 시작했다. SNS가 그들을 잇는 평화적 연대의 끈이다. ‘살아남으라!’ 글을 쓰고, 성금을 보내며, 공짜 레슨을 선물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희망의 다독임이다. 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서로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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