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은 1935년 17세이던 남인수가 본명 강문수로 학생복을 입고 불렀던 ‘눈물의 해협’이 원곡이다. 이 제목으로 히트하지 못하자 1937년 이부풍은 가사를 고치고, 노래 이름을 ‘애수의 소야곡’으로 바꿔 같은 멜로디로 남인수가 다시 불러서 대히트를 쳤다. 이 노래는 같은 가수가 가사와 곡명을 변경해 불러 성공한 노래로, 다시 태어난 곡이 불멸의 애창가요가 된다는 속설(俗說)을 남기기도 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가사 1, 2절)
남인수는 191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대한 설이 많지만, 2013년 남인수 생가와 관련한 관련 부처의 결론으로 정리됐다. 남인수는 부친 강영태가 본처에게서 아들을 보지 못해 마을 어귀 주막 주모이던 어머니(장하방)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동안 알려졌던 생가는 남인수가 태어난 집이 아니라 성장한 집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모니카 연주와 장구·북을 치는 솜씨가 걸출했다. 그는 꼭두새벽에 디벼리(진주시 상대동에서 옥봉동까지 남강변의 절벽 벼랑)의 울창한 대숲에서 발성법을 익혔고, 남강 건너 비봉산 바윗자락을 향해 소리를 질러 소리가 되돌아오도록 했단다. 16세이던 1934년 목포가요제에 참가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고 서울로 올라와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했다. 원곡 ‘눈물의 해협’ 가사는 이렇다. ‘현해탄 초록물에 밤이 나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 서글픈 파도 소리 꿈을 깨우는/ 외로운 수평선에 깊어가는 밤….’
남인수와 이난영(1916~1965)은 1934년 목포가요제에서 처음 만나 ‘연상녀 연하남’으로 사랑에 눈이 맞았다. 이들의 사랑은 악단장 김해송이 끼어들면서 삼각관계가 된다. 이난영은 김해송과 1936년 결혼했고, 남인수는 1939년 동료가수 김은하와 결혼한다. 이후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김해송이 6·25전쟁 때 월북하고 남인수는 KPK악단을 운영하며 3남4녀를 기르는 이난영을 돕다가 1958년 김은하와 이혼하고 사실상 이난영과 재결합했다.
남인수는 1962년 6월 26일 지병인 폐병으로 44세에 첫사랑 이난영의 품에서 작고했는데, 장례식장에서 ‘애수의 소야곡’이 장송곡으로 불렸다. 남인수의 묘는 2012년 진주시 하촌리 선산으로 이장했다. 남인수전승보전회 노력의 결실이다. 비문은 ‘예술인 진주강공휘문수(藝術人晉州姜公諱文秀) 가요황제 남인수의 묘’라고 돼 있다. 그는 100년에 하나, 하늘이 내린 목소리의 소유자이며, 나라 잃은 민초들의 서러운 애환과 분단의 아픔을 위로해준 국민 가요황제였다.
이 노래 작사가는 이노홍(1914~1982)으로, 본명은 박노홍, 예명은 강영숙·노다지·이고려·이부풍·이사라·화산월 등 다수를 사용했다. 1931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빅타레코드사에서 가요를 작사하기 시작한 예술가다. 사람 팔자를 풀면 운명과 숙명인데, 이것을 합치면 신명(神命)이다.
유차영 < 한국콜마 전무이사·여주아카데미 운영원장 >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