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을 많이 쌓아둔 기업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의한 경제 충격이 어디로 튈지 아직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시장이 흔들릴 때 금과 채권 등 안전자산을 찾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경기침체 위험이 커질수록 현금 많은 기업이 돋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순현금 86조원
24일 코스피지수는 127.51포인트(8.60%) 오른 1609.97로 마감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자금 조달 시장의 숨통을 막아 ‘유동성 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각국이 긴급 대책을 내놓은 덕분이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경계심을 쉽게 늦추지 않고 있다. 자금시장의 급한 불을 껐을 뿐 소비, 투자, 고용 등 실물 경기에 대한 충격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투자자들은 현금이 많은 기업에 주목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변준호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각국에서 나온 대책의 핵심은 여유 현금이 없는 한계 기업이 코로나19로 무너지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라며 “이럴 때 부채가 적고 현금이 많은 기업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보유 현금 측면에서 가장 든든한 기업은 삼성전자다. 신용평가회사인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기준 순현금이 86조4535억원에 이른다. 현금성 자산이 104조원에 달해 18조원의 총차입금을 갚고도 86조원이 남는다는 뜻이다.
현대모비스(4조9090억원), 삼성SDS(3조3844억원), 고려아연(2조5805억원), 기아차(2조3139억원), 네이버(2조100억원), 현대건설(1조6379억원), 카카오(1조4501억원), 엔씨소프트(1조4143억원) 등도 순현금이 많은 기업이다. 이들 기업은 경기 침체로 현금 유입이 끊기더라도 보유 현금만으로 차입금을 모두 상환할 수 있어 ‘흑자 도산’ 위험에서 자유롭다.
반면 대한항공은 순차입금(-순현금)이 15조4877억원에 달한다. 총차입금은 17조원에 이르지만 현금성 자산이 약 1조5000억원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신용평가사들이 잇달아 대한항공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내린 이유다. 지광훈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대한항공은 부채와 차입금이 많아 현금 유입 감소에 따른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영업활동 현금흐름 같이 봐야”
전문가들은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판단할 때 영업활동 현금흐름을 같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차입금이 많아도 꾸준히 현금이 들어오면 부도 위험이 크지 않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그런 사례로 꼽힌다. SK하이닉스의 지난해 말 순차입금은 7조7296억원을 기록했다. 2018년 말 순현금을 3조원 갖고 있었지만 지난해에만 14조원이 넘는 돈을 시설투자(자본적 지출)에 쓰면서 차입금이 대폭 늘어난 탓이다. 하지만 지난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이 6조원에 이르는 까닭에 신용등급 ‘AA’에 등급 전망 ‘안정적’을 유지하고 있다. 김승범 한국기업평가 선임연구원은 “코로나19로 올해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줄어들 수도 있지만 투자 축소로 재무 부담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포스코도 순차입금이 8조9961억원으로 보유 현금보다 차입금이 더 많지만 영업활동으로 매년 5조~6조원의 현금을 벌어들이고 있다. 삼성SDI와 LG화학 등 2차전지 기업은 설비투자로 순차입금이 빠르게 늘고 있다. 다만 2차전지가 성장산업이 만큼 향후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같이 늘어날 것이란 기대도 큰 편이다.
국내 기업들이 그동안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 주주 환원보다 현금을 쌓아놓은 편을 택한 것이 전화위복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펀드매니저는 “미국 보잉처럼 그동안 번 돈을 대부분 주주에게 환원한 기업은 이번 위기에 큰 타격을 받았다”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주주가치 제고에 무심하다고 비판받았던 국내 기업들은 쌓아놓은 현금 덕분에 잘 버티고 있다”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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