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국민연금공단 공시에 따르면 2019년 국민연금 보험료 수입은 총 47조8000억원이다. 이 중 사업장가입자 보험료가 약 40조원인데 이는 기업(사용자)과 근로자가 반씩 부담했다. 기업이 약 20조원, 전체 보험료의 41.8%를 부담한 셈이다.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총액은 4조원 정도고 정부 보조금은 연 100억원 수준에 불과하니 국민연금 기금 조성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주체는 기업임이 분명하다.
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최종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총원은 20명이다.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장관과 당연직인 기획재정부,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각 차관 등 공무원이 5명이 포함돼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과 보건사회연구원 원장,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포함하면 정부 측 위원만 8명이다.
반면 기금 조성에 가장 큰 몫을 담당하는 기업 측 대표는 겨우 3명, 20분의 3이다. 근로자 대표도 3명인데,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공공노조 대표가 참여한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조합원 수는 전체 근로자의 11.8%에 불과한데 이들 단체가 전체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것은 심각한 ‘노조 편중’이다. 실무평가위원회도 차관과 국장 중심으로 공무원 6명이 참여하고 있어 비슷한 구조다.
복지부는 지난 1월 21일 국민연금법 시행령을 고쳐 3개 위원회를 신설했다. 그중에 ‘수탁자책임위원회’가 있다. 이 위원회는 ‘국민연금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지침)’을 집행하고, 비공개 중점관리기업을 선정하며, 의결권 행사 방향을 정하고, 기업의 E(환경) S(사회적 책임) G(지배구조) 평가 결과에 따라 기업을 제재하는, 기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위원회다. 다른 위원회는 모두 법률에 근거해 설치됐는데 이토록 기업에 민감하고 중요한 위원회의 설치 근거는 법률이 아니라 시행령에 두고 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 제한, 의무 부과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법률에 정한다는 것이 헌법정신이다. 기업도 국민이다. 국회를 통한 법률이 아니라 행정부의 시행령으로 위원회를 설치해 국민 생활을 간섭하고 제약하는 것은 위헌이다. 이 위원회도 사용자 대표 2명, 근로자 대표 2명, 지역가입자 대표 2명으로 구성됐다. 사용자 대표 2명의 임명도 사용자단체에 전적으로 맡기지는 않는다. 다수의 추천을 받아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고른다. 운동장이 기울다 못해 뒤집힌 꼴이다.
그런데 얼마 전 국민연금은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56개 기업에 대해 투자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변경한다고 공시했다. 작년 말 개정된 ‘국민연금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에 따라 이들 기업을 비공개 대화 대상 또는 비공개 중점관리기업으로 선정하고,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대부분 기업이 왜 이 명단에 올라갔는지 의아해한다고 들었다. 선정 기준도 불명확하지만, ‘경영권에 영향을 주지 않음’을 전제로 한 ‘일반투자목적’이라는 개념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주로 배당 부실, 임원 보수 과다, 횡령·부당 지원 같은 법령 위반 등을 ‘중점관리사안’으로 정하고, 단계별 주주활동(비공개 대화부터 주주제안까지) 대상으로 삼겠다는 얘기인데, 이런 적극적 주주권 활동이 어떻게 경영권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국경제연구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분석한 결과 정부가 공적연금 운용에 직접 관여하고 위원장까지 맡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또 해외 공적연기금들은 국내 주식 보유를 엄격히 규제하는데, 국민연금은 2200개 상장회사 중 1000개 넘는 회사에 투자하고 있고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곳이 313개, 최대주주 또는 2대 주주인 곳이 169개에 달한다. 자본시장법상 단기차액반환의무도 적용되지 않는다.
겨우 연 100억원을 기여하는 정부는 기업에 보험료를 강제 징수하고 연금의 주인 행세를 하더니, 위헌적 시행령까지 마련했다. 국민연금은 큰돈 대는 기업을 극진히 대접해도 모자랄 판에 이젠 수십 개 기업을 골라 뺨까지 때릴 태세다. 국민연금 자체의 지배구조가 엉망인데, 누굴 보고 지배구조를 고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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