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이 금융감독원이 제시한 외환 파생상품 키코(KIKO) 분쟁 조정 결과를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 키코 사건과 관련해 금감원의 합의 권고를 따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두 은행이 처음이다. 이미 법률적 판단을 받은 건에 또다시 배상하는 것은 배임 소지가 있다는 게 이유다. 일각에서는 무조건적인 ‘업계 때리기’를 이어가던 금감원의 행보에 은행들이 반기를 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최근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의 키코 분쟁 조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잠정 결론을 냈다. 산은 관계자는 “법무법인의 자문을 거쳐 법률적인 부분을 검토했다”며 “내부적으로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씨티은행도 이날 이사회를 열고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한국씨티은행 측은 “피해 기업(일성하이스코)에 대해 회생절차 과정을 통해 분조위가 권고한 금액(6억원)을 훨씬 초과하는 수준으로 미수 채권을 이미 감면해준 사정 등을 고려했다”고 불복 배경을 설명했다. 다만 “나머지 자율배상 대상인 39개 기업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보고 판단하겠다”며 “법적인 배상 책임은 없지만 금감원의 권고 취지를 고려해 예전 법원 판결 기준으로 합당하게 보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작년 12월 분조위는 은행들이 키코 피해 기업 네 곳에 손실액의 15~41%(총 255억원)를 배상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은행별로는 신한(150억원) 우리(42억원) 산업(28억원) 하나(18억원) 대구(11억원) 씨티(6억원) 등이었다. 나머지 피해 기업 147곳에 대해서는 분쟁 조정 결과를 토대로 은행들에 자율 조정을 권고했다. 조정안을 받아들일 경우 은행들이 배상할 금액은 2000억원대로 추정됐다.
이후 금감원은 통보 시한을 두 차례에 걸쳐 연장했다. 은행들이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쟁조정안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우리은행 한 곳뿐이다.
두 은행 결정이 다른 은행들의 결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감원이 제시한 수락 여부 통보 시한은 6일까지다. 신한·하나·대구은행 세 곳은 이날 이사회를 열고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들이 ‘미운털’이 박히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며 “법률적으로 배임 소지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말했다.
키코 사건의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품 설계 자체가 ‘사기’였는지 여부, 다른 하나는 판매 과정에서 ‘불완전판매’가 이뤄졌는지 여부다. 불공정성·사기성은 수차례에 걸친 경쟁당국과 사법부 판단 결과 “그렇지 않다”고 판명났다. 검찰은 기업들이 신한·외환·제일·씨티은행을 사기 혐의로 형사고발한 건에 대해 2012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피해 기업들이 낸 민사소송과 관련, 불완전판매만 일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23개 기업이 손해액의 평균 26%(총 105억원)를 배상받았다. 금감원이 분쟁 조정을 내린 것은 이미 법적 소멸시효(10년)가 끝난 뒤였다.
금감원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 수락하지 않아도 은행 책임은 없다. 금융권 관계자는 “윤석헌 금감원장은 취임 이후 줄곧 ‘소비자 보호’를 강조하며 은행들에만 무거운 책임을 물어 왔다”며 “자율 권고 사항이지만 대부분 은행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리더십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소람/임현우/송영찬 기자 ra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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