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疫學)에서는 질병을 확산 범위에 따라 크게 풍토병(endemic), 유행병(epidemic), 범유행병(pandemic)으로 분류한다. 접미어 ‘데믹(demic)’은 그리스어 ‘데모스(demos)’, 즉 ‘민중’ ‘국민’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전염병은 ‘사람들이 모인’ 데서 출발한다.
윌리엄 맥닐의 저서 《전염병의 세계사》를 보면 수렵생활을 하던 인류가 농작물 경작으로 정착생활을 하면서 전염병의 필요조건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농업을 통해 씨족에서 부족, 나아가 도시가 형성되면서 ‘사람들이 더 모이게’ 됐고, 이에 비례해 특정 종의 동식물이 과다하게 증식하면서 생태계 균형에 변화가 초래됐다.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의 잠재적인 먹이가 인간 공동체에 밀집하면서 전염병이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전염병은 인류 문명 진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며, 그 진화 역시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 또 세계화의 진전으로 확산 속도는 빨라지고 범위도 확대될 수밖에 없다. 기원전 4세기 에티오피아에서 발생하고, 이집트 무역항로를 거쳐 유입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의 패배를 가져온 ‘역병’ 이후 전염병의 확산 경로는 대부분 전쟁과 무역이었다. 14세기 몽골의 침략 및 지중해 무역항로를 따라 확산된 유럽의 흑사병도 그랬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시작돼 500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온 근대사 최악의 유행병으로 기록된 스페인 독감 역시 그렇다.
최근만 해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돼지인플루엔자,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에볼라바이러스, 지카바이러스 등 여러 전염병이 발생했다. 교통수단 발달에 따른 세계화 추세 속에 감염 경로가 다양해지고 확산 속도 역시 빨라졌다. 과거엔 풍토병으로 국한됐을 질병이 전 세계적 유행병으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은 인류에게 전염병에 대한 방패도 선물했다. 17세기 네덜란드 과학자 뢰이우엔훅이 현미경을 통해 미생물을 관찰한 이후 세균학, 의학, 약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천연두·장티푸스 박멸과 인플루엔자 백신 개발 등 혁혁한 성과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 전염병의 공통요인인 ‘데믹’의 의미는 ‘사람’이다. 따라서 전염병에 대한 사람들의 대응 역시 진화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렵시대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을 해야 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매머드나 물소 같은 거대동물을 사냥하는 위험이나,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용맹함을 과시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질병 앞에서는 위험 감수를 할 수 없었다. 예방약도 치료약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질병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전염성 질병의 경우 가족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는 만큼 위험 감수보다는 ‘손실회피’ 반응이 강하게 일어난다.
농업 생산과 정착 생활로 인한 인구 증가는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이에 비례해 감염 확률은 높아졌다. 그만큼 인류는 감염을 이겨내기 위한 생리적 신체 면역 시스템을 진화시켜 왔다. 이를 위한 ‘행동 면역 시스템’ 또한 발전했다. 질병 앞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질병을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행동을 즉각적으로 취하게 된다. 지금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같이 유행병이 창궐할 때 기침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피하거나, 중국인 전체에 대한 혐오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존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존본능은 소비 패턴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사람들은 해외관광뿐 아니라 극장, 공연장, 쇼핑몰 등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을 기피한다. 즉 ‘데모스’가 분해돼 ‘아트모스(atomos·개인)’로 회귀하는 것이다. 아트모스로 회귀하다 보면 오프라인 소비는 온라인 소비로, 대면 소비는 비대면 소비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 즉 언택트(untact) 소비 패턴으로의 변화가 더욱 크게 일어나는 것이다. 원시시대 생존본능으로 우리 DNA에 각인된 행동 면역 시스템이 소비시장에서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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