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떠날 땐 절대 어딜 안 갔다. 그게 여행을 잘하는 요령이라고 생각해서다. 관광객이 득시글대는 곳은 더 안 갔다. 여행이 직업인 이에게 ‘들어본 적 없는’ 곳을 개척하는 것, 현지인도 잘 모르는 ‘핫 플레이스’를 뚫는 일은 일종의 ‘사명’이랄까…. 아무튼 그간의 여행은 그랬다.
청개구리 같은 짓을 멈춘 이유는 단순하다. 그런 여정이 너무 힘들었다. ‘남들 다 가는 때’는 최적의 날씨·기온·습도를 의미한다. 그때를 피해서 가면 너무 덥거나 춥거나 비나 눈이 사정없이 내린다. 어떤 곳이 ‘관광지’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른들은 그런 걸 ‘명불허전’이라고 말한다. 인파, 바가지요금, 불편한 상술에도 불구하고 성수기에 인기 여행지는 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내게 그런 곳 중 으뜸을 꼽으라면 단연 하와이다. 호기심 많은 지인들이 “어디가 제일 좋았어?”라고 물으면 아마존이니 닝갈루니 옐로나이프니 근사한 지명을 들먹일 수 있었지만 내 대답은 언제나 망설임 없이 하와이였다. 지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중적인 휴양지이자 뉴욕보다 더 살벌한 물가를 자랑하는 값비싼 섬, 7월 말의 해운대만큼이나 붐비는 와이키키 해변, 생각보다 탁한 수질(와이키키만 그랬고 다른 곳은 대부분 맑고 반짝반짝 빛난다)이라는 달갑지 않은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이 관광지에 매료된 이유는 하나다. 빅 아일랜드 때문이다.
지각 운동이 ‘현재 진행형’인 젊은 대지
빅 아일랜드는 하와이 제도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여섯 개 섬 중 가장 큰 섬이다. 주에서 부여한 공식적인 이름은 하와이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와이키키’를 품은 그 섬, 호놀룰루 카운티와 구분하기 위해 ‘빅 아일랜드’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하와이에 사는 사람에게 “와이키키에 숙소를 잡았다”고 하면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말이 돌아온다. “거긴 진짜 하와이가 아니야.” 마우이에 사는 친구는 ‘마우이’가, 라나이에 사는 사람은 ‘라나이’가 진짜 하와이라고 한다. 더 많은 이들의 입에서 나온 지명은 ‘빅 아일랜드’다. 입안에서 공기를 굴리며 발음해야 하는 폴리네시아의 이국적인 언어 대신 멋없고 밍밍한 이름이 붙은 이 섬에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그 답은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알게 된다. 1주일 전에 솟구친 용암이 급속 냉각된 것 같은, 괴이하고 싱싱한 대지와 그 위로 도깨비 머리칼처럼 듬성듬성 솟은 잡초. 짙푸른 바다와 싸움닭같이 들이치는 파도는 이 날것의 풍경에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더한다.
빅 아일랜드의 첫인상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이 섬에선 실제로 지구의 ‘지각 활동’이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5월, 킬라우에아 화산의 용암이 45m까지 솟구쳐 주택가를 덮쳤다는 뉴스, 올 2월 푸우오오 분화구가 30여 년간 지속됐던 용암 분출을 멈췄다는 뉴스가 그 증거. 미국지질조사국 하와이화산관측소는 “마그마가 이동하고 있다. 곧 새로운 화산 분화가 시작될 예정이다”는 경고로 빅 아일랜드의 ‘젊음’을 입증했다.
미 대륙의 끝, 카라에에 서다
빅 아일랜드에 짐을 푸는 이들은 대부분 이 세 곳 중 한 곳에 머물게 된다. 코할라 코스트, 카일루아코나, 힐로. 글로벌 브랜드의 호텔과 리조트, 명품 브랜드 매장이 들어선 쇼핑몰이 숙소 선택의 주요 조건이라면 코할라 코스트가 만족스러운 베이스 캠프가 될 것이다. 카일루아 코나는 좀 더 ‘동네’ 같은 모습을 갖췄다. 민박과 모텔, 레스토랑과 바, 카페, 기념품 상점, 미국 갑부들의 별장지 등이 이곳에 모여 있다. 그 사이 사이 1820년에 세워진 하와이 최초의 개신교 교회, 모쿠아이카우아 처치, 왕국시대의 흔적 훌리헤에 궁전 등의 유적이 볼거리를 더한다. 힐로는 이 섬에 사흘 이상 머무는 이라면 한 번쯤 지나야 하는 지역이다. 빅 아일랜드의 하이라이트 ‘볼케이노 국립공원’이 이곳에 있다. 섬 안에선 나름 경제 중심지다. 여행자가 돈 쓸 수 있는 곳이 많다는 뜻이다. 이 세 중심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야생의 대자연이다. 그중엔 지명조차 부여받지 못한 오지도 꽤 많다.
나의 원대한 계획은 미지의 땅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 무식한 꿈을 이뤄줄 첫 목적지는 미 영토 최남단, ‘카라에’(또는 사우스포인트로 불린다). 400~800년 사이 폴리네시아인이 최초로 하와이 제도에 왔을 때 상륙한 포인트로 추정되는 신성한 장소다.
가는 길은 짐작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도 위에서 지명이 사라지고 위성항법시스템(GPS) 앱이 정신을 내려놨을 때쯤 겨우 검은 소(방목해 키우는 가축)가 아닌 ‘사람’을 발견했다. 차를 세우고 모래와 자갈을 실은 바람에 뺨을 맞으며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가 땅끝 맞아요?” 아이스크림 트럭 앞에 서있던 젊은 남자애가 대답 대신 고갯짓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거기에 절벽이 있었다. 그 아래 펼쳐진 바다를 따라 수백일간 항해하면 ‘남극’만 나온다는 그 땅끝. 많은 이들이 ‘세상의 끝에서 뛰어내리는 경험’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물론 내겐 원주민도 겁내는 악명 높은 조류에 몸을 던질 생각 따윈 없었다. 뛰길 포기한 이가 할 일이라곤 뛸까 말까 고민하는 다른 이의 등을 구경하는 일뿐. 그 무모하고 위태로운 젊은 등, 그 옆에서 아들과 함께 유유히 낚시를 즐기는 늙은 남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눈부신 바다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초록 모래는 진짜 있다
지구상에 똑같은 모양의 자연은 없지만, 다른 곳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장소는 있다. 사우스 포인트 옆, 그린 샌드 비치가 그런 곳이다. 이곳은 말 그대로 초록색 모래를 품은 해변이다. 백과사전에선 ‘4만9000년 전 분석구에서 나온 감람석이 잘게 부서져 형성된 곳’이라고 설명한다. 출발 전부터 그냥 착시 현상일 거라는 의심을 품고 길을 나섰다. 여정이 쉬울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타고 간 차가 무용해질 거란 생각은 못했다. 겉은 바삭, 속은 축축한 캬늘레 같은 광야가 인간과 자연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보는 어불성설, 렌터카는 ‘차 값을 통째로 물어주고 싶다면’ 시도해 볼 만하다. 대부분은 입구 앞에서 바가지 요금을 뒤집어 씌우고 방문자를 실어나르는 봉고차에 몸을 싣는다. 차가 너무 낡아서 인도의 인력 시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것만 빼면 참을 만했다. 금과 옥을 갈아엎은 것 같은 신비한 빛깔의 ‘물질’과 야트막한 둔덕을 품에 안은 기암절벽, 그 앞에서 부서지는 파도가 빚는 절경은 화성에서 해수욕하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이곳에 닿기 전까지 마주했던 고생과 허기, 갈취에 가까운 ‘봉고차 티켓’ 비용을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볼케이노 국립공원
드디어 화산 한복판으로 들어서는 날. 아침 일찍 마우나 로아와 킬라우에아를 아우르는 볼케이노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킬라우에아’는 1983년 이후 30여 년간 쉼 없이 끓어오르는, 살아있는 산이다. 지구과학 시간에 글과 사진으로만 배운 화산 활동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앞에서 흥분과 설렘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정상에 자리한 지름 6㎞의 칼데라와 초대형 화구, 할레마우마우 분화구를 제대로 보려면 하늘에 올라야 한다. 경험자들은 ‘헬기를 타면 뜨거운 용암이 차가운 태평양 바다로 흘러 들어가 구름 같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장관을 볼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걸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미리 예약을 안 한 죄로 걷는 쪽을 택했다. 볼케이노 국립공원을 두르는 241㎞의 하이킹 트레일은 땅의 온기를 피부로 느끼며 ‘화산’을 겪을 수 있는 방법. 분화구가 용암을 뿜어내는 게 아니라 천천히 거품을 게워내듯 토한 덕에 만들어진 자연적인 길이다. 하루에 241㎞를 정복할 순 없으므로 방문자는 자신의 체력, 취향에 따라 한나절 혹은 반나절이나 한두 시간짜리 갈래 길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마우나 로아와 킬라우에아 산자락 사이에 붙은 새끼 분화구를 관통하는 ‘이키 트레일’을 걷기로 했다. 길어야 90분만 걸으면 되는 ‘속성’ 트레일인 건 비밀이다.
용암이 굳은 지 얼마 안 된 지형을 걷는 건 확실히 특별한 경험이다. 운동화 밑창과 양말을 뚫고 올라오는 땅의 온기, 거북이 등껍질 같은 대지의 갈라진 틈새로 삐져나오는 증기는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마저 들게 한다. 괜한 상상으로 주저하는 발걸음을 다독인 건 그 죽은 땅에서 기어이 뿌리를 내린 꽃과 나무들. 봉긋 솟아오른 봉오리를 뚫고 수줍게 얼굴을 내민 레후아 앞에 서니 이곳이 지구인지 우주인지 굳이 분간하고 싶지 않다.
빅 아일랜드는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쥔 전 세계 갑부들이 은퇴 후 여생을 보내는 섬이다. 이곳에 머무는 내내 나는 그들이 왜, 편리한 호놀룰루를 두고 편의 시설이 거의 없으며 화산재가 스모그처럼 섬 전체를 덮는 이 땅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킬라우에아 산 한 자락에서, 지구에 혼자 남은 듯한 기분마저 드는, 달콤한 고립감을 느끼며 그 답을 어렴풋이 찾았다.
빅 아일랜드(하와이)=글·사진 류진 여행작가 flyryu@naver.com
여행정보
하와이안항공이 호놀룰루에서 빅 아일랜드의 힐로공항, 코나공항을 왕복하는 주내선을 운영하고 있다. 동선에 따라 코나 공항으로 들어가 힐로 공항으로 나가거나 혹은 반대로 스케줄을 짜면 효율적인 여정을 꾸릴 수 있다. 커피와 맥주는 빅 아일랜드 방문의 또 다른 목적이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예멘 모카와 더불어 ‘세계 3대 커피’로 불리는 코나 커피는 섬 곳곳에 숨은 600여 개의 커피 농장 중 한 곳을 들르면 싱싱하게 맛볼 수 있다. 서울의 웬만한 펍에서 즐길 수 있는 ‘코나 맥주’의 본사도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 무료로 운영하는 브루어리 투어를 신청하면 제조 과정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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