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자동차 부품 업체 보쉬는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쇼 ‘CES 2020’에 스마트홈 서비스를 들고나왔다. 부스의 3분의 1가량을 할애해 가전제품을 전시하고, 가정용 사물인터넷(IoT) 서비스를 선보였다.
보쉬는 자율주행 셔틀차(콘셉트카)를 공개하면서 미래 모빌리티(이동수단) 기술도 뽐냈다. 보쉬 이사회 멤버인 미하엘 볼레는 “2025년까지 모든 제품에 인공지능(AI)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보쉬의 경쟁 상대는 더 이상 자동차 부품 업체들이 아니었다. 완성차 업체는 물론 가전, 정보기술(IT) 업체를 망라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LG전자가 전통적인 라이벌 외에 보쉬 등과도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업종 간 경계 허물어져
‘CES 2020’은 전례 없는 초(超)연결, 초경쟁 시대의 막이 올랐다는 사실을 알리는 무대였다. 일본 전자 업체 소니가 내놓은 자율주행 전기차(VISION-S)와 현대차가 전시한 개인용 비행체(PAV) 등은 혁신과 융합의 아이콘이었다.
하드웨어 업체가 소프트웨어 업체로, 굴뚝 업체가 첨단 IT회사로 바뀌고 있다. 업종 간 경계가 무너져 전혀 다른 업종에 속했던 기업이 어느새 경쟁자로 등장했다. 애플이 애플TV플러스를 선보이며 콘텐츠 시장에 뛰어들자 넷플릭스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은 글로벌 기업들의 합종연횡도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도움이 된다면 누구와도 손잡고 제휴한다. 어느 한 기업의 힘만으로 주도권을 쥐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장 차세대 모빌리티 분야에서 큰 전선(戰線)이 형성됐다. 차량공유 업체 우버와의 제휴를 전격 선언한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우리 미래 사업 중 30%는 개인용 항공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버는 2023년 ‘하늘을 나는 택시’를 상용화하겠다고 선언했다. 도요타자동차는 에어택시를 개발 중인 미국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조비에비에이션에 4500억여원을 출자하기로 했다. 유럽에선 아우디·에어버스·이탈디자인이 연합군으로 뭉쳤다.
정부가 기업 혁신 도와야
전통 제조업체들이 혁신·벤처기업과 손잡고 새로운 비즈니스(서비스) 모델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디지털 전환을 통한 사업 영역 파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지만, 한국은 외딴 섬과 같다. 혁신을 억누르는 기득권 세력과 기업을 옥죄는 규제가 판치는 풍토 탓이다. 삼성은 각종 수사와 재판에 손발이 묶여 글로벌 인수합병은커녕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다. 현대차도 기득권의 등쌀에 한국보다는 주로 해외 업체와 제휴 및 합작에 나서고 있다.
규제의 주체인 정부와 공무원은 여전히 기업의 ‘윗전’이다. 한국식 ‘의전 문화’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올해 CES 현장에서도 적지 않은 기업인이 관련 부처 장관 등 고위공무원을 모시느라 시간을 비워둬야 했다.
이런 마당에 기업이 원하는 규제 혁신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정부가 치적으로 내세우는 규제 샌드박스마저 부처 간 소통 부재와 공무원들의 소극적인 일 처리 탓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기업들의 불만이다. 정부가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는 3월부터 민간경제단체인 대한상의에도 규제 샌드박스 접수창구를 마련하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정당한 규제 완화 요청에 소극적이거나 시간을 끄는 공무원에 대한 감사청구권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어떨까.
leek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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