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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달리는 호랑이' 같은 베트남 내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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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가 이처럼 떠들썩할 줄은 몰랐다. 사회주의공화국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는 지난 24일 밤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빈컴몰 등 대형 쇼핑센터 입구는 사람과 오토바이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작고 귀여운 빨간색 산타복을 입은 아이는 양손을 부모의 손에 맡긴 채 거대 크리스마스 장식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성탄절이 근무일이라는 건 까맣게 잊은 듯, 청춘들은 베트남 특유의 낮고 작은 의자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

하노이의 성탄절 전야는 수십년 전 한국의 모습과 꽤나 닮았다. 요즘은 저작권 문제로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1970년대부터 2000년 초반까지도 성탄절을 맞은 서울의 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대와 흥분으로 들끓었다. 모든 게 암흑천지 같던 군사 독재 시절, 크리스마스 전야는 유일하게 통행금지가 적용되지 않는 하루였다. 가난이 싫어, 고향을 떠나 어두침침한 가리봉동의 공단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던 청춘들은 적어도 그날만큼은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 아래에서 고단함을 녹였다.


시간의 격차가 있긴 하지만, 베트남과 한국의 크리스마스 풍경은 본격적으로 산업사회로 진입한 개발도상국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농촌의 자급자족형 노동력들이 도시로 몰려들며, ‘수출 전사’로 변신한 덕분에 민간 소비를 근간으로 하는 내수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다. 베트남이 내로라하는 글로벌 분석 기관들의 예상을 깨고 올해 GDP(국내총생산) 성장률 7.03%(추정치)를 달성한 데엔 민간 소비의 활력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 베트남의 실업률은 2.2%로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까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16년 2.3%에서 대동소이한 수치다.

하노이, 호찌민 같은 대도시의 소비력은 1인당 GDP 3000달러 수준이라는 베트남의 공식 통계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고급 아파트 단지엔 포르쉐, 롤스로이스, 벤츠 같은 고급 자동차들이 즐비하다. 한 마리에 300달러를 호가하는 바다 가재 요리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원양어업이 발달하지 못한 데다 냉장, 냉동 유통 인프라가 낙후돼 있어 베트남의 해산물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비싼 축에 속한다. 그런데도 한국산 광어 수입 물량 중 8할은 베트남 현지인들에 의해 소비된다. 최근엔 와인 시장도 급성장하면서 10여 년 전 중국에 불어닥친 고가 와인 열풍이 베트남에도 찾아올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베트남의 소비 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은 급료와 소득의 차이의 존재를 간파하는 것이다. 월급은 한국 돈으로 50만원도 채 안되는 돈을 받으면서도 고급 차를 굴리고, 고가 주택에 살고 있는 상류층들이 수두룩하다. 의사만해도 소속은 국립병원이지만, 자택을 개인 클리닉처럼 활용해 진료를 보는 이들이 꽤 많다. 국가가 ‘소셜라이징(socializing)’이라는 명분을 걸고 국립병원에 필요한 고가의 의료 장비를 민간 회사로부터 도입하곤 하는데, 이 때 의사들이 부족한 급료를 채우는 일이 다반사다. 각 개인들이 자신의 소득을 신분에 맞게 벌충하는 일을 정부가 용인하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

관료 사회만해도 민간 기업과의 공생 관계를 통해 부족한 급료를 채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소방, 세무, 환경, 안전 등과 관련된 공무원들이 정기적으로 조사를 나오는데 그 때마다 작게는 50만동(약 2만5000원)에서 1000만동(20만원)씩 대행사를 통해 일종의 거마비를 준”며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뇌물로 볼 수도 있지만, 각 부처의 회식비나 경조사비 등 일종의 공금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개인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착복할 때에만 부정부패 혐의로 엄벌한다는 얘기다.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도 현금을 선물처럼 주고 받는 일이 흔하다. 예를 들어 지인이 자신의 아들이 취직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지인에게 아들 월급의 10% 정도를 몇 달 간 선물로 주는 건 베트남 사회에서 상식에 속한다. 한국의 기준으로 보면 뇌물과의 경계가 애매한 일들이다. 가족 공동체라는 개념이 상당히 확장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도 급료와 소득의 갭을 메워주는 요인 중 하나다. 한 은행 관계자는 “여직원 한 명이 급하게 대출을 요청하길래 물어봤더니 집안에 삼촌 한 명이 어려운 처지에 있어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더라”며 “베트남에선 아직까지 집안의 경조사를 함께 챙기는 일이 흔하다”고 말했다. 교통 체증이 심한 하노이 도심에선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는 갑남을녀들이 걸인들에게 소액이나마 기꺼이 적선하는 모습을 쉽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베트남의 요즘은 한국의 1980년대와 비슷하다. 1차 산업에서 2, 3차 산업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는 시점이 대략 1인당 GDP 3000달러 수준일 때다. 베트남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1인당 국민소득을 현재의 약 10배 수준인 3만달러 이상으로 올려놓기 위해선 아직 증명해야할 것들이 산적해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환경 문제 해결, 투명성을 통한 효율적인 정부 운영을 비롯해 부동산 등 비제조업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는 자원을 어떻게 제조업으로 분산시키느냐와 같은 것들이 주요 과제 목록이다.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긴 하지만, 1억명에 가까운 내수 시장은 베트남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핵심 요소다. 이와 관련해 베트남이 한국보다 나은 게 한 가지 있다. 인구정책이다. 한국은 다른 선진국의 선례를 좇아 인구가 급성장하던 1970,80년대에 산아제한정책을 적극 펼쳤다. 그 결과는 현재 인구 절벽이라는 재앙으로 현실화됐다. 베트남도 2017년까지도 가족계획을 진행했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얼마 전 『베트남의 정해진 미래』라는 책을 낸 조영태 서울대 인구학과 교수는 “베트남 정부가 수십년 째 두 아이 낳기 캠페인을 벌이면서 2005년 이후 출산율이 2.0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베트남 정부는 인구정책의 틀을 인구발전, 인구배당이라는 개념으로 완전히 전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구발전론은 ‘인구 배당’이라는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 인구 한 명을 기업의 주식에 비유한 것으로, 개인의 발전은 곧 나라의 배당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개념이다. 이를 위해 베트남 정부는 교육과 건강 등 인구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할 것이라는 게 조 교수가 그의 저서에서 내린 결론이다. 현재 9646만명(세계 15위) 수준인 인구를 1억4000만명 이상으로 늘리되, 양적인 팽창만이 아니라 질적 향상까지 달성하겠다는 게 베트남 정부의 목표다. 하노이, 호찌민 외에 지방 거점 도시를 육성해 인구를 분산시키겠다는 것도 목표의 한 축이다. 호찌민 7군에서도 30km 떨어져 있는 빈즈엉(Binh Duong)이 대표적이다.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소비 도시로 성장 중이다. 빈즈엉성 한복판에 있는 이온몰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호찌민에 올 때마다 벤치마킹 대상으로 찾는 곳이다. 이온그룹이 허허벌판이던 곳에 대형 쇼핑몰을 지었을 때 한국의 대형유통그룹들은 ‘제정신이냐’며 혀를 끌끌 찼다.

올해 한국의 대(對)베트남 투자가 1위에 올랐다는 통계가 나왔다. 앞다퉈 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하고, 투자한 결과다. 하지만 베트남이라는 거대 내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인 포석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 제품 중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이라고 해봐야 롯데리아 햄버거가 첫 손에 꼽힐 정도다. 지역적으로도 하노이, 호찌민 등 기존 대도시에만 집중도 있다. 내수 시장 공략과 관련해 한 베트남 전문가는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한국은 이미 훌륭한 ‘테스트 베드’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내 ‘베트남 며느리’와 그들의 자녀들이다. 한·베 가정에 통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베트남 내수 시장 공략의 해법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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