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풀이
虎: 범 호
死: 죽을 사
留: 머무를 유
皮: 가죽 피
누구도 어딘가를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 떠나도 그곳에 흔적이 남는다. 그러니 떠나도 머무는 셈이다. 누구나 삶의 곳곳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바로 ‘나’이고, 바로 ‘당신’이다.
5대10국(五代十國) 시대는 중국 역사의 큰 혼란기다.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한 뒤 979년 조광윤이 중국을 통일해 송나라를 세우기까지 불과 70년 동안에 수많은 나라가 흥하고 망했다. 5대(五代)는 화북의 중심을 지배한 나라로 양(梁)·당(唐)·진(晉)·한(漢)·주(周)의 다섯 왕조를 말한다. 10국(十國)은 화남과 지방에서 흥망한 지방정권을 뜻한다.
5대 왕조 중 하나인 양나라에 왕언장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성격이 우직하고 전쟁에선 누구보다 용감했다. 싸움에는 항상 쇠창을 들고 나가 별명이 ‘양철창(王鐵槍)’이었다. 산서에 있던 진나라가 국호를 후당(後唐)으로 바꾸고 양나라로 쳐들어왔다. 왕언장은 크게 패해 파면까지 당했다. 얼마 후 후당이 양나라를 재침공했고, 다시 군사를 맡은 왕언장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왕언장의 용맹을 높이 산 후당 왕이 귀순을 회유했다. “당신은 두 번이나 지고 이리 붙잡힌 신세까지 되었소. 돌아가도 좋은 대접은 없을 터이니 나와 같이 일해 보는 게 어떻소.” 왕언장은 단호했다. “아침에는 양나라를 섬기고 저녁에는 진나라를 섬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분노한 왕은 그의 목을 치라고 했다. 형장으로 가는 그는 참으로 의연하고 태연했다. 그는 평소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虎死留皮),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人死留名)”는 말을 자주 했다. 실제로 그는 죽어서도 의로움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 《오대사》 왕언장전에 나오는 얘기다.
남긴다는 건 설레는 일이다. 누군가 나를 향기로 기억한다는 건 뿌듯한 일이다. 남긴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누군가 나를 악취로 기억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불교의 윤회에 의하면 전생의 흔적이 현생의 나이고, 현생의 흔적이 내생의 나다. 허명(虛名)은 좇지 마라. 하지만 향기 나는 흔적, 향기 나는 이름은 아낌없이 남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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