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철강 등 제조업체는 물론 공기업, 대형 유통매장, 정보기술(IT) 업체까지…. 올 들어 사법부가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한 기업들이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 바람을 타고 불법파견 판결은 확대일로다. 그동안 직접 생산공정만 불법파견이 금지됐으나 법원의 판결로 이제는 간접 공정까지 금지된다. 완성차 선적 업무나 지게차 수리같이 직접 생산공정과 관련성이 낮은 업무도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업종과 생산 시스템의 특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판결이어서 산업현장 곳곳에 비상이 걸렸다. 산업계는 “하도급이 원천적으로 금지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소연한다.
외주화(아웃소싱)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외국 기업들과 경쟁하기는커녕 글로벌 경영기법조차 활용이 어렵다는 얘기다.
근로자 파견의 복잡성은 근로자를 고용하는 사업주(파견사업주)와 사용하는 사업주가 다른 데서 출발한다. 파견근로자를 지휘·명령하는 주체는 사용사업주다. 도급은 원청과 하청업체 간 도급계약만 있을 뿐 근로자에 대한 지휘·명령은 하청업체가 한다. 근로자 파견은 허용 범위가 매우 좁다. 제조업 직접 생산공정은 파견이 원천적으로 금지된다. 전문기술이 필요한 업무 등 32개 업무만 파견이 허용되고, 기간도 최장 2년이다.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산업현장에서 ‘도급’과 ‘파견’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생산공정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고 제조업, 유통업, 서비스업 등 업종마다 특성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불법파견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고용노동부·법무부·검찰은 2007년 ‘근로자 파견의 판단 기준에 관한 지침’을 내놨다. 지침은 크게 두 가지 기준을 담고 있다. △파견사업주가 사업주로서 실체를 갖는지 △해당 근로자가 사용사업주의 지휘·명령을 받는지 여부다. 여기에 해당하면 일단 파견으로 보고, 그다음에 근로자파견법의 법적 요건을 충족하는지를 따진다. 요건에 맞지 않으면 불법파견으로 분류돼 시정조치와 처벌의 대상이 된다.
무용지물 된 '파견 판단 지침'
노동계는 근로자 파견이 저임금 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의 주된 원인이라는 입장이다. 농성, 시위 등 실력 행사에 나서는 한편 소송전도 적극 벌인다. 불법파견으로 인정받으면 원청에 직접 고용되고, 원청 근로자와의 임금 차액까지 지급받을 수 있다.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노동조합이 경부고속도로 서울요금소 지붕에서 장기간 벌인 농성과 대법원까지 간 법률 투쟁이 대표적 사례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법원은 종전 적법 도급으로 인정하던 사례도 속속 불법파견으로 판결하고 있다. 노동계는 반기고 있다. 반면 산업계는 비상이다. “정부 지침은 무용지물이 되고, 불법파견 인정 범위가 확대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직접 생산공정에만 한정해 따지던 파견법 위반 여부를 간접 공정으로 확대하는 판결이 속속 나오고 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완성차 수출을 위해 야적장으로 운반하는 하청업체의 탁송 근로자도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이 지난 8월 나왔다. 최근의 기아자동차 불법파견 판결도 같은 맥락이다. 하청업체 근로자들이 수행해온 지게차 수리 업무는 간접 공정 사례지만 법원은 넓게 보면 자동차 생산과 관련이 있다며 불법파견으로 봤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현대차 남양연구소의 하청업체에 소속된 팀장급 관리자도 원청인 현대차 근로자로 인정했다. 법원은 현대차 정규직 임금과의 차액만큼을 현대차가 이들 하청업체 관리자에게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노동계는 즉각 환영하면서 “하청업체 관리자가 불법파견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완성차업계 실무자들은 불법파견 소송이 제기되면 으레 사측이 질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불법파견, 서비스업종까지 확대
제조업체에서 주로 문제시되던 불법파견이 서비스업종까지 확대되고 있다. 올초 대형마트 업체 세이브존 대표는 징역형(집행유예)을 선고받았다. 계산원을 불법파견 받았다는 혐의다. 8월 고속도로 요금수납원이 파견근로자로 인정돼 한국도로공사가 직접 고용하라는 대법원 판결도 서비스업이 대상이다. 최근 IT업계 대기업에서도 이례적으로 불법파견 판결이 나왔다. SK텔레콤이 신규사업 추진 과정에서 계열사인 SK플래닛과 SK테크엑스에서 직원들을 전출받은 것이 문제가 됐다. 계열사들은 직원을 전출시키는 과정에서 수수료를 받는 등 이익을 취하지 않아 ‘파견업’으로 볼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행에 따라 한 계열사 간 전출도 이젠 파견법 위반과 형사처벌의 위험을 안게 됐다.
MES 통한 정보제공도 불가능
원청업체의 공장이 아니라 제3의 공장까지 불법파견 인정 범위를 확대한 사례도 올해 처음 나왔다. 현대모비스의 수출품 포장 전문 협력업체에서다. 이 협력업체 소속 공장에서 부품 품질검사 업무를 수행하던 또 다른 협력업체 소속 근로자들이 낸 소송에서 법원은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현대모비스 품질팀의 업무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 이유다. 자동차업체 불법파견 사건에서는 ‘왼쪽 바퀴는 정규직이, 오른쪽 바퀴는 비정규직이’란 말이 있듯이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는지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회사 밖 제3의 공간이라도 업무상 관련성을 찾을 수 있으면 불법파견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판례를 남겼다.
현대제철은 ‘MES(생산관리시스템·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라는 전산시스템을 사용해 하청업체 근로자에게 업무지시를 했다며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다. 광주고등법원의 이번 판결을 놓고 산업계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MES는 공정과 관련된 정보를 기록하고 확인하는 전산 프로그램으로, 많은 제조업체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광선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도급계약에서도 원청(도급인)이 하청업체(수급인)에 일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까지 지휘·명령으로 보는 것은 법 해석에서 다소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타다'도 불법파견 논란 불붙을 듯
불법파견 판결이 크게 늘면서 산업현장에서는 하도급 등 외주화가 모두 불법이 될 처지에 놓였다. 경영계가 우려하는 대목이다. 상품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전문화와 분업화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려면 다양한 형태의 외주화는 필수적이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도급계약을 통한 외부 노동력 활용은 기업의 권한이자, 글로벌 경영환경에서 대세이며 생존방식”이라고 강조했다.
법과 행정지침이 정한 엄격한 불법파견 사용기준조차 법원이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강화하는 것도 문제다. 기업들은 불법파견 리스크를 줄이려고 법령·지침에 따라 생산공정을 세밀하게 점검해 대응하지만 역부족이다. 법원 판결이 너무 앞서가기 때문이다. 불법파견 논란은 확대일로다. 최근 ‘타다’의 불법 택시영업 논란도 불법파견 쟁점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타다’가 운전기사를 실질적으로 관리·감독했다고 돼 있다.
jsc@hankyung.co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