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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실 칼럼] 한국 경제, 추락인가 탈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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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 엘 에리언 알리안츠 수석경제고문은 비행기의 추락을 막기 위해 준수해야 하는 ‘실속속도(stall speed·失速速度)’를 경제 분석에 자주 인용한다. 한 국가의 경제성장률이 특정 수치 밑으로 떨어지면 경착륙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실속속도는 얼마일까?

올해 성장률이 2.0%에 미치지 못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 가운데 한국은행은 2.0%를 고수하고 있다. “정부가 재정집행률을 높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은이 말하는 2.0%는 전망치가 아니라 정부가 지켜야 할 ‘최후의 목표치’로 들린다.

내년 성장률 전망치 2.3%도 그렇다. “미·중 무역 분쟁이 더 나빠지진 않을 것” “반도체가 내년 중반 회복 국면에 들어설 것” 등 이주열 한은 총재의 발언은 ‘희망사항’으로 가득 찼다. 내년 총선을 의식하고 있는 청와대·정부의 ‘경기 바닥론’에 한은이 장단 맞추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깊어진다.

2% 성장률이 한국 경제의 실속속도라면, 바닥은 올해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내년 성장률을 1%대로 보는 곳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해외 투자은행으로는 UBS(1.9%),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1.6%) 등이 있고, 국내에서는 한국경제연구원(1.9%), LG경제연구원(1.8%) 등이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 재발 가능성은 제쳐두더라도 글로벌 불확실성이 지속돼 한국의 주요 수출국이 실속속도에 이르기만 해도 한은이 바라는 기본 시나리오대로 가기 어렵다. 에리언 고문이 실속속도가 5% 근방일 것으로 보는 중국이 특히 문제다. 중국이 경착륙한다면 한국은 또 한 번 직격탄을 맞을 것이다. 제조업 구조조정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이 외풍을 이겨낼 성장잠재력을 축적해왔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잠재성장률은 1%대를 향해 추락하고 있다. 경제가 실속속도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바닥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장 (경기가) 하강하는 국면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기다리면 올라간다”고 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소리와 같다. 산업통상자원부가 1년 이상 수출이 나빴던 데 따른 ‘기저효과’에 목을 매는 것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통상적인 경기 사이클을 압도하는 역풍에 직면하고 있는데도 청와대·정부의 인식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부 장관은 ‘리먼 쇼크’ 때 로켓 발사처럼 지구의 중력을 이탈할 수 있는 ‘탈출속도(escape velocity)’를 주장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한국은 소규모 개방경제다. 재정 확대, 금리 인하로 위기에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믿을 것은 ‘기업가 정신’밖에 없다. 시간이 없다. 투자 위축이 길어지면 현재를 넘어 미래 성장까지 갉아먹는다. 일부 기업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례없는 사업재편과 세대교체가 그렇다. 앉아서 죽느니 탈출이라도 감행해 보자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경제가 탈출속도를 내려면 더 많은 기업이 가세해야 한다.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기업의 변화는 시속 100마일, 정부·정치의 변화는 시속 30마일이라고 했다. ‘법·제도의 지체 현상’을 지적한 말이지만, 시속 30마일이라도 속도를 내면 선진국이다. 멈춰선 신산업 규제개혁, 뒷걸음질치는 노동개혁에 국내 기업은 절망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싸우고 있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상법·공정거래법도 마찬가지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혁신성장=혁신×속도÷기득권’이란 경험 공식까지 제시했다. 기업이 혁신과 속도를 맡을 테니 정부·정치는 기득권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호소였다. 응답이 없다. 기업의 탈출속도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끌어당기는 중력에 가담하고 있는 게 지금의 한국 정부요, 정치다.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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