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이 ‘세대교체’ 대신 ‘위기 속 안정’을 선택한다. 이달 28일께 이뤄질 인사에서 조성진 LG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부회장단을 전원 유임시킬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인사 원칙을 적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LG그룹 상황은 ‘전시(戰時)’에 가깝다. 미·중 무역 분쟁과 글로벌 경기 침체로 불확실성은 커지고 실적은 악화하고 있다. 배터리 기술 침해를 둘러싸고 SK이노베이션과 소송전을 하는 중이다. TV 기술 주도권을 둘러싸고 삼성과도 전투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계적 세대 교체 대신 노련한 장수를 전선에 세우는 길을 택했다는 설명이다.
샐러리맨 신화는 계속14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이달 말로 예정된 LG그룹 인사에서 조 부회장이 유임될 것으로 전해졌다. 조 부회장은 세대교체 필요성을 이유로 사의를 밝혔으나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LG그룹 관계자는 “조 부회장은 자신이 최고경영자(CEO)직을 유지하는 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으로 안다”며 “하지만 구 회장은 경기가 어렵고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조 부회장과 같은 연륜 있는 경영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조 부회장은 용산공고를 졸업한 뒤 1976년 LG전자에 입사해 2016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샐러리맨의 신화’로 통한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쓴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책에 평사원이었던 그의 이름과 업적이 나올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이름을 날린 ‘세탁기 장인’이다.
세탁기 트윈워시, 의류관리기 스타일러 개발을 주도하고, 국내에 건조기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신(新)가전을 중심으로 탁월한 성과를 내면서 LG전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실적을 유지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세계 1위 가전 회사’에 등극했다. 생활가전사업을 하는 H&A사업본부가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세계 최대 백색 가전 업체인 미국 월풀을 제쳤다.
부회장단 연임에 무게복병은 스마트폰 사업이다. 18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 다만 베트남으로 생산 공장을 이전하면서 원가를 줄였다. 올 3분기 영업손실(1612억원)이 전 분기(3130억원)보다 크게 줄었다. LG전자는 ‘5세대(5G) 이동통신 시대’를 마지막 승부처로 보고 있다.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전장사업의 흑자 전환도 과제다. 글로벌 자동차부품 시장은 미·중 무역 분쟁이 장기화하고 완성차 업체의 구조조정이 지속되면서 어려운 상황이다. LG전자는 최근 콘퍼런스콜에서 “VS(전장)사업본부의 경우 내년 흑자전환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부회장 유임을 선택한 것은 실적 악화가 조 부회장 개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급격한 외부 환경 변화 탓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부회장단도 연임 쪽에 무게가 실린다. 올해 약 1조5000억원의 적자를 낼 것으로 전망되는 LG디스플레이의 경우 지난 9월 한상범 부회장이 용퇴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매분기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하는 LG생활건강은 차석용 부회장 대표 체제를 유지할 것으로 전해졌다.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은 지난해 8월 권영수 (주)LG 부회장과 자리를 맞바꿨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3M에서 영입됐다.
고재연/정인설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