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수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0년간 추진돼 온 ‘금융중심지’ 정책의 실패를 인정했다. 은 위원장은 최근 열린 ‘제38차 금융중심지 추진위원회’ 회의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도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인다”고 했다. 금융중심지 정책은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시아 금융허브’ 청사진을 모태로 한다. 정부는 금융산업 세계화 전략에 따라 2009년 서울 여의도와 부산 문현동을 금융중심지로 지정하고 주기적으로 ‘금융중심지 발전 기본계획’을 내놓고 있다.
은 위원장의 냉정한 평가가 말해 주듯, 우리나라가 ‘금융허브’와 ‘금융중심지’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민망한 상황이다. 수도 서울의 금융산업 경쟁력 순위가 급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컨설팅그룹 지옌이 지난 3월 공개한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 따르면 서울은 세계 112개 도시 중 36위에 그쳤다. 2015년 6위까지 올랐던 경쟁력이 계속 떨어져 30위권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금융중심지의 꿈이 점점 멀어지는 원인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뉴욕, 런던, 싱가포르 등 쟁쟁한 글로벌 금융허브들과 경쟁하려면 관련 인프라를 한 곳에 집중해도 힘겨운 판에 정부는 되레 분산하기에 바빴다. 지역 균형개발의 명분으로 현물(유가증권+코스닥시장)과 선물 시장을 통합한 한국거래소 등은 부산 문현동으로, 국민 노후자금 644조원을 운용하는 국민연금공단은 전북 혁신도시(전주)로 이전시켰다.
인위적인 지방 이전으로 인한 부작용이 속출했다. 국민연금공단은 전주 이전이 가시화한 2016년 이후 기금운용 부문 퇴사자가 100명을 넘었다. 1년 넘게 기금운용본부장 공석 사태를 빚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정부·여당은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들을 포함하는 공공기관 추가 지방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 ‘여건 미성숙’으로 일단 제동이 걸리긴 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제3의 금융중심지’ 지정도 언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지 모른다.
정부가 관치금융 잔재를 버리지 못하고 시장 개입을 일삼는 것도 금융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금융 소비자 보호를 내세워 민간 금융회사를 압박해 대출금리, 카드 수수료, 보험료 인하 등을 강요하고 있다.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들은 자영업자 부담 경감을 명분으로 사실상 ‘관제 카드 결제(제로페이)’ 서비스를 벌이고 있다. 금융을 저소득층과 영세 자영업자를 지원하는 통로로 여기는 듯하다. 금융을 복지·사회사업 보조 수단이 아닌 산업으로 인식해야 금융시장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
금융은 경제의 핏줄이자 핀테크 혁명을 선도할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미국과 독일 등 주요 선진국들이 규제 완화, 해외 금융사 유치 등을 통해 금융허브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것은 금융산업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조만간 내놓을 ‘제5차 금융중심지 발전 기본계획(2020~2022년)’에서 한국 금융허브 정책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책을 담기 바란다. 더 늦기 전에 정책 실패를 인정하는 열린 마음으로 금융산업 미래를 위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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