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인쇄배선회로기판(PCB) 제조업체인 이수페타시스는 컨설팅 업체 캡스톤컴퍼니에 ‘SOS’를 보냈다. 실적 개선을 위해서는 수율을 높여야 하는데 ‘식각 공정’에서 불량률이 좀처럼 낮아지지 않아서다. 현장에 투입된 컨설턴트들은 설비의 ‘온도’와 ‘진공상태’, ‘최적의 작업 환경에 도달하는 시간’ 등 빅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온도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진공상태에 도달하느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빠른 시간에 진공상태에 도달하도록 공정을 전환하자 불량품은 20% 이상 줄었다.
국내외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불황 극복 컨설팅’을 찾는 중소·중견 기업들이 늘고 있다. 신산업을 발굴하고 공격적인 인수·합병(M&A)를 진행하는 ‘전략 컨설팅’보다 영업·생산·구매 등 기존 기업 운영을 어떻게 최적화하고 효율화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에도 두산, 효성 등 제조 기업을 중심으로 생산 원가 및 인건비 절감을 위한 컨설팅 수요가 크게 늘어난 바 있다.
○데이터 분석으로 비용 절감‘마른 수건’을 쥐어짜기 위해 컨설팅 업체들이 주목한 것은 빅데이터다. 박종식 캡스톤컴퍼니 대표는 “누적된 데이터가 많고 이를 활용하기 좋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기업이나 이미 자동화가 진행된 화학업체를 중심으로 데이터 기반 컨설팅 문의가 크게 늘어났다”고 말했다.
캡스톤컴퍼니가 이수페타시스의 불량률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흩어져 있던 데이터를 분석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빅데이터 분석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배석주 한양대 산업공학과 교수(한양대 빅데이터센터장)와 함께 데이터 분석 작업을 하고 있다. 세제, 샴푸 등에 들어가는 화학 원료를 만드는 이수화학, 반도체 후공정 패키징 업체 SFA반도체 등에도 컨설팅을 진행할 예정이다.
삼성, LG 등에서 ‘공장밥’을 먹은 엔지니어들이 차린 컨설팅 회사 룩센트는 M&A 시장 대어로 꼽히는 태림포장 턴어라운드의 주역으로 유명하다. 원지 생산 공장 4곳과 골판지 상자 제조 공장 8곳의 공장 생산 규모와 제품별 제조 원가, 물류비 데이터를 분석해 생산 거점을 최적화하면서 공장의 물류비를 10% 이상 줄이는데 성공했다.
○주 52시간제로 컨설팅 수요↑인건비 인상과 주 52시간 제도 도입 등으로 컨설팅사를 찾는 유통업체들도 늘고 있다. 기존에 있던 직원들이 60시간씩 하던 일을 52시간 이내에 할 수 있도록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수도권에 식자재도매마트를 운영하는 식자재 유통 회사 A사도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늘어난 인건비 부담 때문에 컨설팅사의 문을 두드린 사례다. 룩센트는 △물류 입고 △계산 △배송에 걸리는 시간을 데이터화해 직원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다음날 판매할 식자재가 오후 6시 이후에 마트로 들어오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직원들은 6시가 넘어서야 입고된 제품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머지 근무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회사는 오후 6시 이전에 입고가 끝나도록 물류 배송 체계를 바꿨다. 농산품의 경우 소포장 기계를 도입해 단순 노동을 최소화했고, 남은 인력을 고객이 몰리는 시간대에 계산대에 배치했다. 인력 재배치를 통해 직원들의 개별 근로시간은 15% 가량 줄었다.
할리스커피의 경우 10초 단위로 직원들의 행동을 기록해 데이터화한 뒤 비효율적인 동작을 찾아내는 작업까지 진행했다. 음료 제조 순서와 커피제조기계 배치, 동선을 효율적으로 조정해 1분에 5잔의 음료를 제조하던 직원이 6잔 이상의 음료를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승목 룩센트 대표는 “최근의 컨설팅은 인원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인원으로 노동 효율성을 얼마나 끌어올려 기업 가치를 높이느냐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설명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