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브랜드(No Brand). 이마트가 2015년 4월 선보인 자체상표(PB)다. 상품 수가 1000개를 넘는다. 전국 142개 이마트 점포와 220여 개 전문점에서 노브랜드 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생활에 필수적인 상품을 합리적 가격에 내놓는 유통업계의 대표적 PB로 자리잡았다.
이런 노브랜드의 존재조차 몰랐던 상인들이 노브랜드 점포를 유치해 상권 살리기에 나선 곳이 있다. 강원 동해시 청운1길의 ‘동해남부재래시장’. 2300여 가구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대형쇼핑센터 형태의 시장이다. 지하 1층~지상 4층에 약 160개 상점이 들어서 있다.
5300가구 배후…번성하던 시장지난달 27일 찾아간 시장은 활기가 돌았다. 건물 곳곳에 ‘노브랜드 상생스토어’ 입점을 알리는 노란색 대형 간판이 내걸려 있었다. 고훈 상인회장은 “7월 말 노브랜드가 들어온 이후 하루 평균 방문객이 400~500명 정도 늘었다”며 “젊은 손님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1층에서 마카롱 가게 ‘미세스마카롱’을 운영하는 박미정 사장은 “(노브랜드가 시장에 문을 연 뒤) 매출이 10% 이상 증가했다”고했다.
동해남부재래시장은 1995년 대동현대쇼핑센터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속속 들어서고 상권이 커지면서 10여 년간 번성했다. 반경 500m 이내에 5300가구, 약 1만3000명이 거주하는 상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2000년대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이 전국적으로 점포를 늘리기 시작했다. 동해시에도 이마트 롯데슈퍼 등 대규모 점포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 상인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규제의 보호막’을 칠 수 있었다. 2011년 3월 동해시에 전통상업보존구역으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해 전통시장으로 인정받았다. 동해남부재래시장이란 명칭도 얻었다.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르면 전통시장 반경 1㎞ 이내에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유통매장은 들어올 수 없다.
“e커머스 공세가 더 무섭더라”그러나 소비 트렌트 변화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e커머스의 확산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젊은 소비자가 떠나기 시작했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택배상자들이 아파트 복도를 점령했다. 동해시의 대표적 쇼핑시설 가운데 하나였던 D플라자는 문을 닫았다. 대형 식자재 마트도 시장에 악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10년간 1층에서 영업하던 다이소가 지난 4월 계약 만료로 문을 닫자 시장을 찾는 사람이 더 줄었다. “이러다가 모두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김대기 상인회 부회장은 “우리 상권만 지키려다가 젊은 소비자를 온라인에 빼앗겼다”며 “상인들이 생존을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변화가 필요했지만 뾰족한 수를 찾기 쉽지 않았다. 1층에서 다이소를 운영했던 점포 소유주 최옥경 사장의 고민이 가장 컸다. 그는 시집간 큰딸의 용인 수지 집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2L짜리 생수 6병이 1980원. “이게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노브랜드 생수였다.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였다. 생수뿐만이 아니었다. 젊은 소비자가 좋아하는 대부분 상품이 노브랜드로 팔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상인들 이마트·동해시 찾아가 호소최 사장은 동해로 돌아와 상인회에 노브랜드를 유치하자고 제안했다. 찬반 투표를 했다. 노브랜드 입점에 상인 97.5%가 찬성했다. 상인회 대표들은 바로 이마트 본사를 찾아갔다. 이마트는 그때까지 8곳의 전통시장에 노브랜드 상생스토어를 냈다. 그런데 전통시장 상인들이 직접 본사로 와 점포를 열어달라고 한 건 처음이었다.
동해남부재래시장 상인만 찬성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주변 전통시장 상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상인회 임원들은 인근 북평민속시장(5일장)과 동쪽바다중앙시장 상인회를 찾아가 노브랜드 유치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동해시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대기업 유통매장을 막기 위해 전통시장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던 그 상인들이 8년이 지나 이번에는 “대기업의 점포가 들어와야 우리가 살 수 있다”며 지방자치단체를 설득하는 일이 벌어졌다. 동해시는 지난 6월 유통업 상생발전협의회를 열었고, 그 결과 동해남부재래시장에 7월 30일 노브랜드 매장이 문을 열게 됐다. 동해시는 노브랜드 상생스토어에 다른 대형마트와 SSM이 문을 닫는 둘째, 넷째 일요일이 아니라 첫째, 셋째 일요일에 의무휴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다른 대형 유통매장이 쉬는 날에 문을 열게 해 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김원기 이마트 노브랜드 상생TF 과장은 “상생스토어인 만큼 기존 상인이 판매하고 있는 축산, 과일, 채소 등 신선식품은 팔지 않는다”며 “20~30대 소비자 유치를 위해 ‘키즈 라이브러리’를 설치하는 방안도 상인들과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이마트가 노브랜드 상생스토어 출점을 협의 중인 전국의 시장은 25개에 달한다.
동해=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