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많은 사람이 강한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한국 사회가 이러다 붕괴하는 게 아니냐는 위기의식 때문이란다. 인류 역사상 모든 집단은 예외가 없이 붕괴했고, 또 멸망했다. 그게 역사의 순리이자, 누구나 다 인정하는 숙명이다. 단지 내 시대에는 그런 불행을 당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붕괴하는 도중에도 일부는 재생했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심지어 더 강력해진 경우도 적지 않다. 바로 그런 희망과 의지 때문에 인류는 지금껏 발전해왔다.
한국 사회는 ‘멸망’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붕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잠복했던 사회 갈등이 폭발하면서 예기치 못한 각종 폭력이 난무한다. 분단체제로 생긴 가치관의 갈등은 ‘진영논리’로 비화해 서로를 적대하고 광기와 폭력을 수반하는 단계까지 치달았다. 노동권력, 심지어 시민권력도 폭력을 행사한다. 경제 기반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정책 실패가 가세하며 국가부채가 급증하고, 실업률은 때맞춰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연령대에 걸쳐 높아지고 있다. 주택가격 급등으로 청년들은 결혼을 미루고, 이는 저출산으로 이어져 인구 감소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사회에는 상식과 원칙이 사라지고 있다. ‘조국(법무부 장관)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특권층의 부도덕과 부정의, 부패는 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한민족’ ‘공동체사회’라는 말이 무색해졌다. 한 국가, 한 문명이 붕괴하거나 멸망하는 요인을 연구한 전문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운데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있다. 정의와 도덕의 상실이다.
국가안보의 위험도 우리 숨통을 조인다. 북한은 핵을 포함한 군사적 위협을 더욱 폭력적으로 가하고 있고, 흔들려선 안 될 한국의 군(軍) 기강은 존재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무너졌다. 미·중 간 전면적 충돌(무역전쟁 등)은 세계 질서를 급속한 재편 소용돌이로 밀어넣고, 한국 경제사회의 운명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일본과의 갈등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단·민족·국가가 붕괴한 뒤 사라졌다. 칭기즈칸이 토대를 마련한 ‘대몽골 세계(ULUS)’도 불과 150년 남짓 존재했을 뿐이다. 거대해 보이는 중국사도 ‘국가’와 ‘한족(漢族)’ 단위로 좁혀 보면 실은 패배와 굴종의 역사였다. 하지만 우리는 비슷한 역사공동체로서 장기간 존재해온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족이다. 항상 심각한 문제들을 극복해왔고, 특별히 그런 의지도 강했고, 능력도 남달랐다.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6·25전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참화를 겪으며 절망 속 폐허만 물려받았지만 50년이란 짧은 기간에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이뤄내는 기적을 일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위기도, 어쩌면 더 심각하게 다가올 가능성이 있는 붕괴 위험도 뒤로 물리거나 극복할 수 있지 않겠나. 나는 안타깝게도 역사학자이고 인문학자일 뿐이다. 시스템의 변화를 꾀하거나 기술력을 발전시키는 등 경제활동에는 기여할 수 없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정리해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순 있다. 또한 가치관, 세계관 같은 생각과 행동양식의 변화를 유도하고,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역사를 살펴보며 성공과 실패의 사례 등을 분석한 뒤 리더들에게 의미있는 조언을 할 능력은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고사성어를 나는 ‘지기지피(知己知彼)’로 순서를 바꿔 읽기를 좋아한다. 전술적 승리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승리와 더 큰 목적을 위해 내 정체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지난 600년간(어쩌면 1000년일 가능성도 있다) 자신을 알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기호로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자기 의지로 역사를 운영하는 기회를 터무니없이 양보했다. 중국, 일본, 서양의 여러 나라와 문화 같은 정체불명의 실체에 그랬다. 그것도 마치 미덕인 것처럼 자기변호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반도 멸망론’이란 다소 섬뜩할 수 있는 논(論)을 제기한다. 진짜로 한국이 또는 한민족이 멸망해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숨은 뜻은, 정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정반대다.
부숴야 할 ‘반도적 숙명론’
‘한반도’라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이, 심지어는 통일운동을 한다고 나서거나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마저 무심코 사용하거나 자랑스러워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들이 식민지로 삼는 간계를 숨긴 채 지은 ‘조선반도’를 살짝 변형시킨 말이다. 조선인이 만든 반도국가는 큰 대륙에 붙어 있는 쓸개 같은 존재라는 얘기다. 대륙의 그늘 아래서 간섭을 받고 생존을 위해선 사대를 할 수밖에 없다는 ‘반도적 숙명론’이다. 당연히 역사를 자율적으로 운영한 것이 아니라는 ‘타율성이론’을 만들었다. 고인 물처럼 정체됐다는 패배의식도 낳았다. 게다가 반도인들은 당파성이 강해 항상 내부 싸움에 열중했다는 등 나쁜 성격을 지어내며 ‘반도적 근성론’이라 규정했다. 그런 세뇌와 훈련 때문인지 우리는 변질되고 오염됐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사람들을 보면 이런 ‘식민지 상태’를 벗어난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당연히 반도적인 성격, 가치관, 행동양식, 예술과 반도적인 시스템, 인간성 등을 다 부숴버리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러면 혹시나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다소 위협적인 말투로 ‘한반도 멸망론’을 선언한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해결해야 할 일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조목조목 살펴봐야 한다.
한민족의 부흥과 재건을 위해
먼저 우리를 지칭하는 ‘한민족’은 누구인가? 생물학적으로 어떤 특성과 능력을, 인간적으로 어떤 성격을 갖고, 어떤 문화를 창조했는가? 또 어떤 인종과 종족이 왜, 어떤 사명감으로, 어느 길을 통해 왔으며, 언제 어떻게 정착했는가를 이번 연재를 통해 살펴본다. 이어 ‘민족성’이라 부르는 정체성의 핵심을 내 연구를 토대로 다시 규정한다. 우리가 배운 바와 다르게 발달한 산업과 제련술 등 뛰어난 기술력도 소개하고, 이를 활용한 광범한 무역망과 해양력도 규명할 것이다.
잃어버리고 망각한 만주의 다양한 자연환경과 무궁무진한 자원, 전략적 가치들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중요 전략물자인 철의 생산지는 고구려의 요동성과 안시성 주변이었다. 고려시대까지 활발했던 해양활동도 새롭게 조명한다. 고구려의 해양활동을 이용한 등거리외교, 철과 말, 모피 등의 수출, 백제의 일본열도 진출과 개척, 신라와 유라시아 세계의 교류, 장보고의 해양활동과 신라해적들의 일본열도 침공,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인의 위대한 겨울 항해와 모피무역, 고려가 서아시아 일대까지 연결한 무역망과 막강한 해군력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그뿐 아니다. 신석기 시대 이후로 우리와 혈연, 언어, 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연관이 있던 유라시아 세계의 모습을 지역별로 나눠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그 지역들이 현재와 미래에 지정학적으로, 지경학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가치가 있는지도 찾아본다. 이를 통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발전 정책들의 기초를 잡는 데 차용할 수 있는지 점검할 것이다. 예를 들면 ‘광개토태왕의 동아지중해 조정역할론’ ‘장보고의 경제특구모델’ 등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는 세계질서 재편이라는 태풍의 발원지가 됐다. 적어도 10개 지역에서 영토갈등이 일어나고 역사갈등도 깊어지고 있다. 그 한가운데 우리가 있다. 따라서 그런 상황과 배경, 국제 관계의 본질을 세계사적, 동아시아적, 한민족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알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논할 것이다. 나라, 인류, 문화와 산업을 위해 다가온 신문명의 몇 가지 문제도 소개하면서 인문학자의 조언을 전달하고 싶다. 이를 위해 단군신화, 고구려의 예술과 미학, 신라의 풍류도 등을 소재로 우리 사상을 재해석하고 인류 문명의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로서 제언할 생각이다. 이른바 ‘한민족 역할론’ 이다.
이 연재는 우리를 왜곡시킨 한반도적인 세계관과 성격, 체제, 문화, 국가관 등으로 채워진 현재 상황을 ‘멸망’시키고, 한민족을 부흥과 재건(re-foundation)의 길로 이끄는 타당한 인식과 방법 등을 소개할 것이다.
■ 윤명철 교수는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구려사와 해양사를 주로 연구해왔다. 광개토태왕을 통해 21세기 ‘고구리즘(gogurism·고구려주의)’의 실현을 꿈꾼다. 올해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에서 정년 퇴임하고 사학과 명예교수가 됐다. 한민족학회 회장, 고조선단군학회 회장을 거쳐 한국정책학회 부회장, 유라시아실크로드연구소장 등을 맡고 있다. 1983년 대한해협 뗏목 학술탐사를 시작으로 2회에 걸쳐 황해문화 뗏목 탐사를 한 탐험가이기도 하다. 저서로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고구려 해양사 연구> <한국 해양사> 등 50여 권이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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