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 이토록 많은 공연예술 장르가 한데 녹아들 수 있을까. 서울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에서 공연 중인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국내 관객이 쉽게 느껴보지 못한 독특한 무대 경험을 선사한다. 그만큼 호불호가 크게 나눠질 수 있겠지만 실험성만으로도 충분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원작은 오스카 와일드의 동명 소설이다. 내용은 익숙한 편이지만 ‘총체극’이란 낯선 형식을 내세웠다. 연극과 현대무용, 뮤지컬, 비디오아트 등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대부분의 예술 장르가 무대 위에서 융합돼 펼쳐진다. 연출가 이지나, 작곡가 정재일, 현대무용가 김보라, 무대 디자이너 여신동 등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협업했다.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덕분에 무대는 속도감 있고 파격적으로 꾸며졌다. 재능을 인정받아 스타 아티스트가 된 제이드와 그를 포근히 감싸는 유진의 사랑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지는가 싶더니, 곧장 제이드의 타락과 절규로 이어졌다. 제이드가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장면에서 장르 간 결합이 잘 드러났다. 제이드의 처절한 몸짓은 화려한 원색의 번쩍이는 조명 아래에서 더욱 부각됐다. 시시각각 형태를 달리하는 비디오아트는 제이드의 심리 상태를 잘 드러냈다. 음악은 극의 난해함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넘버(삽입곡) ‘꿈’과 ‘편지’는 감성적인 선율과 가사로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남녀가 함께 역할을 맡는 ‘젠더프리(성 구별 없는)’ 연기도 자연스러웠다. 제이드 역의 김주원, 유진 역의 이자람은 깊은 사랑과 정신병으로 인한 갈등을 매끄럽게 표현해냈다. 제이드를 스타로 만든 오스카를 연기한 강필석은 뮤지컬 전문 배우답게 극 전반을 탄탄하게 받쳐줬다.
다양한 장르가 섞이면서 한계도 드러났다. 노래는 오스카, 무용은 제이드에게 거의 한정됐다. 한 캐릭터가 하나의 장르를 전담하는 것이 관객 입장에서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스토리도 풍성하게 보완하면 좋을 것 같다. 예술가로서의 고민보다 양극성 장애의 고통에 훨씬 무게가 실려 아쉬웠다. 공연은 오는 11월 10일까지.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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