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는 시대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 그래서 모든 차들은 출시 당시에 유행한 디자인과 기술력을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으로는 최근 연결성, 자율주행, 전기화 등의 첨단 기술이 강조되면서 옛 것에 대한 가치가 흐려지기도 한다. 이를 되짚어보기 위해 40년간 자동차 산업을 지켜본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이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클래식카 12대를 소개한다. 그 여섯 번째는 페라리 테스타로사, 포르쉐 911이다.<편집자주>
-1984년형 페라리 테스타로사
테스타로사는 페라리의 전통 색상인 붉은색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제품으로 꼽힌다. 차명은 이탈리아어로 '붉은 머리'라는 뜻으로 1950~60년대에 르망 24 레이스를 주름 잡던 20대 한정판 250TR(Testa Rossa)에서 가져왔다.
1985년 양산을 시작한 테스타로사의 차체 대부분은 알루미늄으로 제작됐다. 운전석 위치는 오른쪽 또는 왼쪽을 선택할 수 있었다. 차체 중앙에는 각 실린더마다 4개의 밸브가 달린 수평대향식 12기통 4,943㏄ DOHC 알루미늄 엔진을 배치했으며 전작인 512BB에 올라간 엔진보다 40마력이 높은 390마력을 발휘했다. 최고속도는 290㎞/h, 0⇢100㎞/h는 5.8초를 기록했다.
페라리로부터 테스타로사의 디자인을 주문 받은 이탈리아의 피닌파리나는 수석 디자이너인 엠마뉴엘 니코시아에게 "기존 복서 엔진의 페라리를 모티브로 람보르기니 쿤타치보다 더 멋진 디자인을 만들라"는 주문을 했다. 고심하던 엠마뉴엘은 어느날 빨간색 베스파 스쿠터를 타고 달리던 어느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목에 감고 있던 빨간색 스카프와 함께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오르는 모습에서 테스타로사의 디자인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테스타로사는 차체 양 옆으로 2m 가량 곧게 뻗어있는 공기 흡입구가 특징이다. 날카로운 모양으로 빗살처럼 나 있어 '치즈 커터(cheese cutter)'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다. 이 공기 흡입구는 후부 양쪽에 장착된 수냉식 라디에이터에 외부 공기를 공급해 냉각 작용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에 나온 경쟁차인 람보르기니 쿤타치 스타일을 의식한 의도적 스타일이라는 후평도 나돌았다.
테스타로사는 미국 시장에 중점을 둔 차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 엔진 헤드를 적용하고 512BB의 단점인 배출가스 문제를 해결했으며 실내 공간도 키웠다. 또한, 선호도 높은 파워윈도우, 에어컨, 6채널 스피커, 카세트 플레이어 등의 편의품목을 마련했으며 미국 규격의 충돌시험도 대비해 안전성을 확보했다.
테스타로사는 1991년 말 512TR로 교체되기 전까지 8년 동안 외형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 단 한 대의 스파이더 만이 피아트 자동차의 창업자 조반니 아넬리의 손자 지아니 아넬리를 위해 제작됐다.
테스타로사는 1994년까지 총 7,177대가 생산됐으며 미국 할리우드의 연기파 배우인 니콜라스 케이지와 영국가수 엘톤 존, 프랑스 배우 알랑 드롱, 영국 배우 휴 그랜트, 미국의 가수 겸 모델인 패리스 힐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이 애용했다.
한편, 어린이를 위한 1/2 스케일의 미니 테스타로사도 나왔다. 미국의 자동차 광인 세브 고스가 그의 아들을 위해 만든 토이 카로, 잔디깎기용 가솔린 엔진을 얹었다. 파이퍼글래스로 제작된 차체는 실물처럼 여닫히는 도어, 보닛, 리어 엔진 및 후드 외에도 팝업 헤드램프, 속도계, 가죽 인테리어 등을 갖췄다. 최고시속 40㎞를 넘지 못하는 가장 느린 테스타로사였지만 당시 9만7,000달러(약 1억원)의 가격표를 붙여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장난감 자동차로 꼽혔다. 3대만 제작됐다.
-1992년형 포르쉐 911
스포츠카의 살아있는 전설 '포르쉐 911'은 포르쉐의 첫 작품인 356의 후속으로 개발됐다. 그 시작은 1963년 등장한 901 컨셉트로 '어른 4명이 즐겁게 탈 수 있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스포츠카'라는 목적으로 개발됐다. 그러나 개발과정에서 뒷좌석은 어른이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아져 어린 아이용으로 대체됐다. 이때 등장한 2+2 시트 구성은 '한 가족이 즐겁게 탈 수 있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스포츠카'의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됐다.
당초 911은 컨셉트카에 따라 '901'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했지만 푸조가 가운데 '0'이 들어간 이름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어 911로 개명했다. 911은 첫 번째 모델의 코드 넘버지만 계속 나오면서 911을 붙일 수 없어 앞자리 9만 고수하고 그 뒤에는 세대를 표시하는 고유 넘버를 부여했다.
911의 강점은 이코노믹 슈퍼카에 근접했다는 점이다. 수공 제작이 아닌 대량생산 방식을 채택해 비슷한 성능의 페라리, 람보르기니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덕분에 지난해 누적 생산 100만대를 기록할 수 있었다. 또한, 현행 7세대 911 중 991 터보는 복합효율(유럽 기준)이 ℓ당 10.3㎞를 기록해 타 슈퍼카들의 2배 이상 경제성을 발휘하며 배기가스 규제를 전부 만족시킨다. 각종 요철도 무난히 주행할 수 있는 서스펜션은 911이 일상적인 주행을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다. 카레라4S의 경우는 AWD로 눈길, 빙판길, 진흙길도 주파 가능하다.
첫 911은 19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데뷔해 1964년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356과 같은 RR(리어 엔진, 리어 드라이브) 구동 시스템과 새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130마력, 최고속도 210㎞/h를 낼 수 있었다. 게다가 페라리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비슷한 성능을 낼 수 있었던 911은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포르쉐는 911의 디자인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세대별로 자연스러운 디자인 변화를 진행했다. 그 결과 하나의 디자인을 50년 넘게 지속하게 됐다. 911은 앉아 있는 두꺼비 엉덩이처럼 생긴 뒤태와 개구리 눈같이 튀어나온 동그란 헤드램프, 뒤쪽에 설치된 수평대향식 엔진에 후륜 구동 방식을 고집하는, 그럼에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스포츠카로 유명하다. 특히 패스트백 스타일과 수평대향 엔진의 넓은 폭 때문에 형성된 통통한 뒷모양은 911만의 디자인 매력이다. 911의 디자인은 포르쉐 창업자인 페르디난드 포르쉐의 손자인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가 맡았다. 그는 포르쉐 자동차 디자인부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1세대부터 6세대까지의 911을 빚어냈다.
지금까지 개성이 가장 뚜렷했던 911은 3·4세대가 꼽힌다. '가장 좋은 포르쉐'라는 평판을 듣던 3세대의 964는 공랭식 수평대향 6기통 3,600㏄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250마력, 최고시속 260㎞, 0⇢100㎞/h 5.7초의 성능을 지녔다. 2세대 911과 비슷한 외관이지만 부품의 80%를 새롭게 설계했다. 모노코크 차체에 코일 스프링의 서스펜션을 얻어 우수한 핸들링 특성을 확보했으며 풀타임 4WD와 오토매틱 팁트로닉 자동변속기를 장착했다.
1993년에 나온 4세대 993은 911의 공랭식 엔진을 마지막으로 얹은 제품이다. 지금도 최고의 911로 평가 받아 중고차 시장에서도 고액에 거래되고 있다. 외형상으로는 964와 비슷하지만 헤드라이트를 눕힘으로써 공력 성능을 올렸다. 3세대보다 프론트 펜더의 높이를 낮추고 테일엔드의 디자인도 새롭게 꾸몄다. 멀티링크 구조의 리어 서스펜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리어 펜더도 넓어졌다. 덕분에 머플러 용량의 증대와 배기계통의 개선 효과도 이룰 수 있었다. 1995년에는 비스커스 커플링 방식의 4WD 시스템을 탑재한 카레라 4가 등장했다.
911은 슈퍼카 못지않은 고성능과 아담하고 볼륨감 있는 매끈한 디자인, 큰 부담이 없는 가격으로 세계의 저명인사들도 앞다퉈 애용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2세대 930터보를 비롯한 3대의 911을 가지고 있으며, 할리우드 톱스타인 톰 크루즈는 검정색 993을 타고 다닌다.
또한, 911은 닛산 GT-R, 쉐보레 콜벳, 애스턴마틴 밴티지, 메르세데스-AMG GT, 아우디 R8, BMW M4,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 같은 여러 스포츠카의 비교 대상이 돼왔다. 심지어 슈퍼카인 페라리, 람보르기니, 맥라렌, 쾨닉세그 조차 911을 개발 타겟으로 삼았다고 한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